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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 - 다양한 예술 분야에 단골로 등장되는 무대

by 넥스루비 2007. 8. 7.

광한루와 춘향전은 불가분의 관계로서 소설로나 판소리, 영화, 연주, 창무극 등 다양한 예술의 분야에 단골로 등장되는 무대이다. 이 광한루는 조선 태종 18년(1418)에 황희 정승이 양녕대군의 폐출불가를 주장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이곳 남원으로 이치(移置)되었을 때 누각을 짓고 「광통루(廣通樓)」라 한데서 연유한다.

그후 1434년(세종 16)에 남원부사 민여공이 중수하고 1437년에는 부사 유지례가 단청을 하였다. 1444년(세종 26)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가 이 누각에 올라 "호남의 승경으로 달 나라에 있는 궁전 광한청허지부가 바로 이곳이 아니던가"라고 감탄한 나머지 이름을 광한루(廣寒樓)라 개칭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건물은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은 1626년 당시 남원 부사인 신감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한루의 전·후면에는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 「계관(桂觀)」, 「광한루(廣寒樓)」란 현판이 걸려있다. 「廣寒」과 「淸虛府」는 하늘나라 옥경에 들어서면 「廣寒淸虛府」의 현판이 걸려있다는 신화적 전설을 상징하고 있으며 「桂觀」은 달나라의 계수나무 신궁을 상징한다. 광한루 현판은 신익성이, 호남제일루, 계판, 영주각의 현판은 부사 이상억이 중수하면서 손수 써 걸었으며 이 중 계관현판은 동학운동때 강대형이 다시 써 걸었다.

1869년 무렵, 광한루 본관이 차츰 북쪽으로 기울어져 이를 방지하기 위해 누의 북쪽에 다락을 세워 층층대를 만들어 놓았는데 이 북쪽의 다락을 현관(玄關)이라 일컫는다. 광한루는 양수(陽數)인 홀수로 짓되 경회루 보다 두칸 적은 5칸으로 짓고 누 앞에 은하를 상징하는 연못을 파고 삼신산을 조성하였다.

현관은 상·하 2층으로 되어 있는데 상·하층 모두 5단의 층층계단이 있고 양측에는 간살을 설치하였으며 현관 옥상의 자그마한 지붕은 본관의 높고 큰 지붕과 대조를 이루어 누각의 미를 한층 더해 준다. 구조는 익공식으로 창방 위에 코끼리 등의 동물모양의 화반(花盤)을 놓았다. 본루(本樓)는 막돌 바른층 쌓기의 낮은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사각의 돌기둥을 세웠고 2층 마루부분에는 나무기둥을 세웠다.

2층 누마루 주위에는 계자난간을 둘렀고 기둥사이에는 모두 분합문의 들창을 달아 사방이 모두 개방되게 하여 북쪽으로 교룡산이, 남쪽은 금암봉이, 멀리는 지리산 반야봉과 노고단이 보인다. 기둥 위에는 주두(柱頭)를 얹고 기둥머리부터 쇠서(牛舌)을 하나내고 그 위에 행공첨차를 놓아 외1출목을 구성하고 다시 위에 쇠서를 내어 오익공과 비슷한 주심포 건물을 만들었으며 창방과 주심도리 사이에는 화반을 기웠다. 7량가구.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연목과 부연이 있는 겹처마. 건물 네 귀의 춘설(春舌)에는 활주(活柱)를 받쳤다. 1925년 대수리 공사때 루의 동쪽으로 달아낸 익루(翼樓)는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3면에는 퇴를 둘러 개방하였고 그 안쪽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온돌방(翼室, 直室)을 두었다. 


※ 4대 누각

평양의 부벽루
진주 촉석루 - 1960년 복원
밀양 남원루 - 1844년 복원
남원 광한루 - 1626년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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