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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덕주산성 - 덕주공주가 쌓은 산성. 내성과 외성을 갖춘 나성

by 넥스루비 2016. 7. 12.

덕주산성은 신라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가 피난하였던 곳이라고 전해 오는데 월악산의 산마루와 그 지맥을 둘러싸고 내성과 외성을 갖춘 나성(羅城, 외성)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곳은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 요새지이기 때문에 이 성은 차단성(遮斷城)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대개 성벽은 화강암 자연석을 약간 다듬어 사용하였는데 현재 유구는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과 북문, 동문 등이 남아 있다.

덕주산성은 현재 4개의 곽(郭)을 두르고 있는 것으로서 이러한 산성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더구나 이 산성은 그 규모에 있어서 충청, 전라지역인 양호(兩湖, 호서와 호남) 지역을 통틀어 최대 규모의 산성이다. 

4개의 성벽은 각기 가장 상류인 상덕주사터를 포용한 계곡을 막은 상성(上城) 또는 내성(內城)을 제1곽 으로 하고, 제1곽과 덕주골의 하덕주사까지를 에워싼 학소대(鶴巢臺)가 있는 동문(東門)에서 이어진 중성(中城)이 제2곽 을 이룬다. 월악 동문은 이 두 성만을 보면 외성의 정문에 해당된다. 

그러나 보다 넓게 덕주골을 에워싼 수경대(水鏡臺)에서 계곡을 막은 하성(下城)의 차단성이 제3곽 을 이루고 있고 다시 송계계곡을 남북문으로 막은 외곽을 이룬 관문(關門)이 제4곽 을 이루고 있다. 산성의 4중의 성벽들 가운데 특히 제2곽과 제4곽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수축되었다.
현존하는 북문, 남문, 동문이 홍예식의 성문으로 유구가 남은 것과 무사석(武砂石)으로 축조한 것은 성곽 축조의 양식으로 보아 이런 사실을 말하여 준다. 

덕주산성의 성벽은 기본적으로 내외겹축(內外夾築)의 석축성벽을 기본형으로 삼아 축조되었다. 그러나 지형상 험준한 곳은 천연의 암벽 자체를 성벽으로 삼고 있다. 석재는 모두 월악산에 널려있는 암괴에서 채취한 것을 이용하였다. 

현재 가장 잘 남아있고 길다란 것은 중성인 제2곽의 남쪽 성벽과 북쪽 성벽, 내성인 제1곽의 남쪽 계곡 좌우를 축조한 부분, 차단성으로 하성인 제3곽의 북쪽 산기슭, 외곽성인 제4곽의 남문 서쪽 성벽 등이다. 

이들 성벽은 각기 축조 방식에 조금씩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내성인 제1곽과 중성인 제2곽의 북측으로는 아직도 여장(女墻)이 잘 남아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에는 조선 후기의 성벽이 많이 남아있으나, 여장이 본래의 모습으로 남은 것은 거의 찾기 힘든다. 중성의 남측 성벽은 성벽 내부를 계단식으로 부석(敷石) 처리한 것으로서 가장 전형적인 특징적 축성방법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덕주산성은 성내에 사찰을 마련하여 경영하였던 것으로서 이 산성의 축성동기가 어찌하였던 간에 덕주공주의 초상으로 전해오는 마애불의 연대와 관련이 깊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마애불은 남향하여, 미륵리의 석불입상이 북쪽을 향한 것과 마주보고 있다고 전해온다.

이 산성은 10세기에 축조되어 19세기 말까지 경영과 수개축이 계속되어 온 것으로서 주로 고려시대에 북방의 이민족(異民族)이 침략한 시기 인근의 주민들이 피난처로 이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덕주산성의 남문은 서쪽에 특수한 등성계단 시설을 갖추고 그 내부에 연못을 가진 구조로 되어서 가장 완전한 성문과 주변시설을 갖춘 관문으로서 축성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유구이다. 축성 기술적인 면에서도 서쪽의 경사면에서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힘을 지탱하여 받아 주므로서 남문 자체의 보호와도 관련이 있는 특수한 시설이다.

사진출처 story.kakao.com/jkkim 김종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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