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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당남성재 - 이 곳은 주로 하급관리나 서민들의 자제가 수학했던 곳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북 남원시 쌍교동 216

남성재는 광한루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대지 내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집인 남성재가 남동향하여 자리하고 마당 서쪽에는 교직사였던 것으로 보이는 3칸집이 동향하여 위치하였다. 남성재는 구한말에 설립된 서당으로 자연석 기단위에 세워져 있으며 덤벙주초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전면의 두 번째 초석은 쇠시리가 있는 원형초석으로 초석 상면에 새김이 있어 다른 곳에서 가져다 쓴 것으로 보인다. 평면은 가운데 대청을 두고 좌우에 방이 있는 형태로서 대청은 전면 2칸, 측면 2칸 모두 4칸의 크기이며 앞은 터 있고 뒤쪽은 주간마다 풍혈이 있는 머름대를 설치한 후 각각 두 짝 판문릉 달았다. 현재 서쪽 방은 전후 2칸을 통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동쪽 방 앞에는 마루를 깔아 툇마루를 구성하고 뒷벽에는 벽장을 달아내었다. 방과 대청사이는 띠살문이 있다. 가구는 3량구조로 전후 평주 위에 대량을 걸고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는 구조이다. 장혀 밑에는 상량문이 남아있어 1875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 서당은 구한말 당시 남원부청의 이방< 吏房 > 이순식< 李舜植 > 때 설립된 것으로 주로 관원들의 자제가 수학하던 관서당이었다고 한다. 성 남쪽에 위치하여 성남재< 城南齋 >라 불리어 오다 광복 후에 남성재< 南城齋 >로 개칭되어 해방 후까지 서당으로 존속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남원지< 南原誌 >에는 남원부내에 3곳(성동재 - 남원여중동쪽담장옆, 운봉관서당 - 운봉초등학교부지내)의 관서당이 있었는데 두 곳은 철거되고 유일하게 남은 곳이 남성재라고 한다. 남원지역의 노씨, 이씨, 조씨 세 문중에서 장학회를 조직하여 관리하여 왔으니 현재는 거의 방치된 채로 건물은 매우 퇴락한 상태이다. 부성 내 관원들의 자제들이 주로 수학하여 관서당으로도 불려지나 성동재< 성동재 >라 하여 성내에 또 다른 관서당이 있었고 또한 성 가까이 북쪽에 관학인 향교가 있어 이 곳은 주로 하급관리나 서민들의 자제가 수학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교육기관인 향교와 서원 외에 서당이 현존하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이 건물은 1875년에 건립된 것으로 일반적인 강당의 형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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