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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장 - "안성맞춤"의 대명사인 안성유기

by 넥스루비 2007. 8. 7.

경기 안성시 봉산동

유기를 놋쇠 또는 통쇠라고 하며 구리와 주석을 7대3으로 합금하여 만든 놋그릇을 방자유기(方字鍮器)라고 하고 구리와 아연을 합금하여 만든 그릇을 황동유기(黃銅鍮器)라고 하며, 구리에다 니켈을 합금한 것을 백동유기(白銅鍮器)라 한다.
우리나라의 유기제작은 멀리 청동기시대부터 시작하였는데 철기시대가 시작되면서부터 차츰 청동기의 유기제작기법은 없어지고 7세기경에 신라에서는 철유전(鐵鍮典)이라는 기관이 생겨서 유기제작을 관장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그 제작기법이 더욱 발달하여 얇고 광택이 부드러우며 탄력이 있는 유기를 제작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기술이 퇴보하였다. 안성유기가 최초로 언제부터 유명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개 조선 중엽부터로 보고 있다. 안성은 서울로 통하는 남부의 교통요지로서 안성시장이 발전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엽 이후 부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성에는 국가에서 경영하는 유기공장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경국대전'이나 '대전회통'등에서 안성의 유기공들에 대한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안성 시장은 3남지방의 물산이 총집산되었던 곳이다. 안성유기는 이러한 중에서도 가장 중추가 되어 각 지방의 유기점으로 조직되어 생산액도 거창하였다.
안성유기는 한동안 그대로 잘 유지되어 오던 것이 일제 침략으로 인하여 1941년부터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어 전국에 있는 유기를 거두어 들임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어 일시에 안성 유기가 없어지는 큰 수난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뜻 있는 유기공들은 산으로 숨어 들어 계속 유기를 만들었다. 일본의 전쟁중에는 안성 유기가 별로 성행을 보지 못하여 5 - 6곳이 있을 정도였으며 대부분 일제의 눈을 피하여 산속 등지에서 숨어 제작하였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안성 유기는 갑자기 성행하여 안성시내 곳곳에서 유기업을 시작하였다. 이때는 식기류인 반상기를 중심으로 하여 수저, 젓가락, 담배대 등을 비롯하여 해방의 감격으로 급격히 성행한 농악기구까지 만들게 되었다. 본래 농악기구는 방자(놋쇠를 달군 후 두들겨 만드는 방법)식으로 제품을 만드는데 안성 유기의 특징은 주물 제작법이었으므로 이 때부터 안성 유기에도 방자 제작법이 성행하여 안성 유기의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안성 유기도 거대한 생활 변화로 밀려오는 시련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은 광복 후 반짝하고 빛나던 성황이 사라진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 생활에 있어서 연료의 변화가 온 것이다. 본래 우리나라의 일반적 연료는 장작을 위주로 한 나무였다. 그러나 6.25가 지나고 대도시의 연료가 연탄으로 바뀌게 되었다. 주로 부엌에서 사용되는 놋식기는 연탄가스와 상극적인 관계가 있어 시뻘겋게 녹이 슬거나 누렇게 변해버려 곧 식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유기 대신에 알루미늄 그릇이나 스텐레스 그릇으로 바꾸어 사용하게 되고 아울러 유기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6.25를 전후해서 안성의 유기는 절정을 이루는 듯하여 그 공장의 수만도 37개나 되었으나 이때부터 점점 한집 두집 사라지면서 모두 전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지금은 오직 안성맞춤이란 속담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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