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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고 - 군사연구문화재( 軍事硏究文化財 )로서 매우 높이 평가( 評價 )

by 넥스루비 2007. 8. 7.
서울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박물관 103

옛 군사장비중< 軍事裝備中 >에는 북( 鼓 )과 징( 鉦 )이 있어 이로써 전진< 前進 >이나 정지< 停止 >의 신호< 信號 >를 삼았으니 즉 전진< 前進 >과 후퇴< 後退 >에 있어서 북을 치면 움직이고 징을 치면 정지< 停止 >를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 對 >해 문종원년< 文宗元年 >(1451) 6월< 月 > 초< 初 >3일< 日 >에 수양대군< 首陽大君 >(세조< 世祖 > : 1417∼1466)의 서문< 序文 >으로 간행< 刊行 >된 진법< 陣法 >이나 성종< 成宗 >5년< 年 > (1474)에 완성< 完成 >된 국조오례의< 國朝五禮儀 > 군례조< 軍禮條 >에 의< 依 >하면 ‘송< 宋 >나라 황공소< 黃公紹 >가 지은 운회< 韻會 >에 군행< 軍行 >의 정< 鉦 >과 탁< 鐸 >을 금< 金 >이라 한다’하였고, 또한 후한< 後漢 >때 지은 석명< 釋名 >에 말하기를 ‘금< 金 >은 금< 禁 >으로서 전진< 前進 >이나 후퇴< 後退 >를 금지< 禁止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전률력지< 前律曆志 >에는 가죽을 고< 鼓 >라고 하였다. 또 사고< 師古 >에는 고< 鼓 >는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공씨< 孔氏 >는 무릇 군< 軍 >의 진퇴< 進退 >에 있어 고< 鼓 >를 치면 움직이고 정< 鉦 >을 치면 정지< 停止 >한다 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금< 金 >과 고< 鼓 >는 예로부터 군사행동< 軍事行動 >에 있어 기필< 期必 >코 상비< 常備 >하여야 할 장구< 裝具 >였던 것이다. 현재< 現在 > 육군박물관< 陸軍博物館 >에 소장< 所藏 >된 금고< 金鼓 >는 정< 鉦 >으로서 그 명문< 銘文 >에 음각< 陰刻 >된 바와 같이 선조< 宣祖 >19년< 年 >(1586) 3월< 月 >에 제조< 製造 >한 것이다. 이는 옛 장인< 匠人 >들의 특수공예기법< 特殊工藝技法 >인 타제< 打製 >로서 정중< 正中 >에는 지름 19㎝ 정도< 程度 >로 계선< 界線 >을 둘리고 그 내부< 內部 > 채받이 안으로 삼파문< 三巴文 >이 선명< 鮮明 >하게 음각< 陰刻 >되었으며 그 계선< 界線 >에서 외곽< 外廓 >으로 21㎝ 떨어져서는 점차< 漸次 > 모를 재면서 5㎝ 높이로 울이 형성< 形成 >되었는데 그 정중< 正中 >에는 5.2㎝ 사이하여 손잡이 끈 구멍이 뚫리었다. 이는 그 규모< 規模 >가 매우 소담스런 면을 자아내면서 오랜 연륜< 年輪 > 전평시< 戰平時 >를 두루 경과< 經過 >하였지만 상흔< 傷痕 >이 전무< 全無 >하게 유존< 遺存 >되어 군사연구문화재< 軍事硏究文化財 >로서 매우 높이 평가< 評價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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