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숙종29년 (1703)에 국방에 대한 새로운 인식 속에서 해상을 방어할 목적 으로 축성된 것이다.
성은 내·외성으로 이루어졌고 성벽은 자연석으로 쌓았지만 중요한 부분은 가공한 무사석< 武砂石 >으로 쌓았으며, 성의 길이는 17,337m 이고 높이는 1.5 ∼3m 정도이며 면적은 약 8.213㎢ 에 달하는 거대한 성이다.
북문
처음에 산성을 쌓은 것은 확실치 않으나 효종 6년(1655)에 동래부사 임의백이 이 산성을 다시 쌓고 부치< 府治 >를 옮기자는 건의를 한 바 있으며, 또 현종 8년(1667)에 통제사 이기형이 성터가 남아 있었다는 기록을 한 것으로 보아 이미 산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숙종 28년 (1702) 에 이르러서야 경상감사 조태동의 건의로 이듬해 동래부사 박태항, 이야와 함께 성을 쌓게 되었다. 또 숙종 33년 (1707) 동래 부사 한배하가 중성< 中城 >을 쌓았으나, 숙종 40년 (1714) 이후 성이 너무 넓고 크다 하여 폐허케 되었다.
그후 순조 7년 (1807) 수축공사로 동래부사 오한원이 동문을 준공하고 이듬해에는 서·남·북문의 문루< 門樓 >를 완성하였고, 이 사실을 기록한 부설비< 復設碑 >가 전해온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72년 부터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1974년까지 동·서·남문을 복원하였으며, 1989년 북문을 복원하였다.
서문
동문
제4망루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