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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 조선왕조의 상징적인 궁

by 넥스루비 2016. 8. 21.

1392년 고려에 이어 조선 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太組 李成桂, 1335 ∼ 1408), 그가 1394년 한성으로 도읍을 옮겨 그 이듬해 창건한 조선의 정궁(正宮)이다.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궐(北闕)이라고도 불렀다. 낙산, 인왕산, 북악산으로 둘러싸인 경복궁은 풍수상 길지의 요건을 두루 갖춘 명당이다.


궁의 명칭은 정도전(鄭道傳, 1337 ∼ 1398)이 「시경(時經)」'주아(周雅'의 한 구절인,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

이미 술에 취하여 이미 덕에 배불렀으니 군자말년 그대의 큰 복일레라 에서 두 자 '경복(景福)'을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이른바 경사롭고 복된다는 뜻이다. 이 때의 궁의 규모는 390여칸에 불과 하였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제3대 태종(太宗, 재위 1400∼1418)때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하면서 궁내에 경회루와 시각을 알리는 보루각 등 크고 작은 전각들을 증축하였다. 이후 여러 임금을 거쳐오면서 많은 수축과 증축이 있음으로 하여 궁의 규모는 점점 커졌다.

그러나 1592년 4월 임진왜란때 왜병과 난민의 방화로 전소(全燒)된 후 270여년간 폐허가 되어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1865년(고종2)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 ∼ 1898)의 강력한 발의로 여타 궁궐의 규모나 격식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의 경복궁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고종5년 7월, 1868, 공사기간 약 40개월). 그 규모는 7,225칸이며 후원에 지어진 융문당(隆文堂)이하의 전각도 256칸이고 궁성 담장의 길이는 1,765칸이었다. 궁이 완성되고 나서 1868년 왕은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어렵사리 준공된 경복궁은 일제 침략의 독수에 걸려 태반이 헐리고 또 변모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교태전의 아미산 굴뚝, 자경전의 십장생굴뚝, 경회루와 건물을 장식한 십장생, 해태, 기린은 매우 인상적이다. 물을 상징하는 해태는 궁과 마주보는 관악산이 불의 산이기 때문에 화재를 막는 의미로, 기린은 인재등용의 의미로 쓰였다.

경복궁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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