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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향교 - 위풍 있게 도사리고 있는 한 무리의 한식기와집의 군락

by 넥스루비 2007. 8. 7.
광주 남구 구동

광주광역시 서구 구동 광주공원과 사동 사이에 위풍 있게 도사리고 있는 한 무리의 한식기와집의 군락이 유서 깊은 광주향교이다. 향교는 공자를 제사하는 문묘와 거기에 부설된 중세의 학교를 말하며 고려와 조선조를 통해 국가의 교육기관으로서 기능 했다.
광주향교의 초창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조선 태조 1년(1392)에 각 도의 안찰사에게 교학의 쇄신을 명한 것을 계기로 대부분의 향교가 세워졌던 사실로 미루어 이 무렵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원래 광주향교는 장원봉 아래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호환(虎患)이 심해 어느 때 인가 성안으로 옮겨졌으나 저습한데다 좁고 퇴락하여 1488년에 현 위치로 옮겨지었다. 당시의 향교 이건사적은 성종 때의 문신 성현(成峴)이 자세히 써서 남겼는데 역사가 벌어지자 서민들이 마치 아버지 일을 돕는 아들들처럼 서둘러 불과 수개월에 일을 마쳤다고 전하고 있다. 특히 이 일을 위해 현감 권수평이 많은 사재를 던져 논과 밭을 사고 사서오경 등 책도 마련했다. 이에 감격한 감사 이숙감, 도사 정탁 등도 비용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 때 완성된 향교가 대성전 동·서무, 명륜당, 사마재, 동·서재, 전사청 등 현재의 규모와 거의 비슷한 것이었다.
여러 건물의 쓰임새를 성현의 글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산현 학교조(新增東國輿地勝覽 光山縣 學校條)]을 통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성전(聖殿, 大成殿)을 지어 오성(五聖)과 십철(十哲)을 안치하고 또 동서무(東西무)를 지어 70제자와 역대의 여러 현인을 안치했다. 앞에는 명륜당을 두어 강학하는 곳으로 삼고 또 동서쪽에 협실이 있으니 동쪽에 있는 것은 교관이 앉는 곳이고, 서쪽에 있는 것은 이름을 사마재라 하여 고을의 상사가 우거(寓居)하면서 학업을 닦는 곳이다. 또 동서재가 있으니 곧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며, 서재 뒤에 전사청이 있고, 동재 뒤에는 교관의 사무실이 있다. 이에 신과 사람이 모두 평안하고 스승과 학생의 집이 있으며 堂과 창고와 부엌과 목욕탕이 각각 있을 곳이 있어 무려 60여 칸이나 되었다."
현재는 대성전, 명륜당, 동·서무, 동·서재, 내·외삼문, 문회재(文會齋), 양사재 등의 건물이 있다. 배치는 전면의 낮은 곳에 강학공간을 두고 후면의 높은 단에 문묘공간을 둥 전학후묘의 배치유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륜당은 대성전과 내삼문이 이루는 일직선상에서 약간 우측으로 이동되어 있으며 동·서무와 동·서재는 각각 대성전과 명륜당 전면에 대칭으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향교의 진입과정은 대부분의 향교가 주 진입문인 외삼문을 향교의 전방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나 광주향교에서는 외삼문을 향교의 우측담 아래에 두어 명륜당과 동재를 사이로 하여 경내로 진입하게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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