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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부석 - 제상의 부인이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by 넥스루비 2007. 8. 7.
울산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646-4

삼국시대의 세력관계를 볼 때 신라는 동남의 한구석에서 늦게 일어나 그 힘이 가장 약하고 발전 또한 지지 부진하여 반도에서는 북으로 고구려와 서로는 백제세력의 압박을 받고 또한 바다 건너 일본의 계속되는 침략에도 시달려 오고 있을 때이다.
신라 제17대 내물왕이 36년(391)에 왕자 미해(美海 - 삼국사기는 未斯欣)와 제19대 눌지왕 3년(419)에 왕제 보해(寶海 - 삼국사기는 卜好)를 차례로 왜국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고 있었으나 두 나라는 오래도록 풀어주지 않았다.
눌지왕이 나라의 왕으로 다시 없는 영화를 누렸으나 두 왕제를 이웃나라에 볼모로 보냈으니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이 때 삽량주간으로 용맹과 지혜를 갖춘 박제상(朴堤上)이 신하들의 추거함에 따라 왕명을 받고 고구려로 들어가 보혜왕제를 구출하여 돌아왔다.
그러나 눌지왕은 한편은 반가우나 왜국에 인질로 있는 미해왕제를 생각하니 간절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를 본 박제상은 자청하여 일본의 미해왕제도 구출해 올 것을 말하고 그 길로 일본을 향해 율포(栗浦)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이 일을 알게된 박제상부인은 남편의 뒤를 따랐으나 그는 이미 배를 타고 손을 흔들 뿐이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박제상은 거짓으로 계림왕이 나의 부모를 죄없이 죽였으므로 도망하여 왔다하고 항상 미해왕제를 모시면서 틈을 보아 왕제를 배를 태워 도망가게하고 그는 남아서 잡혀 일본왕의 신하되기를 한사코 거절하다가 마침내 목도(木島 - 對馬島)에서 소사되고 말았다.
국내에서는 미해가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백관을 명하여 굴헐역(屈歇驛 - 凡西面 屈火로 추정)에서 맞이하고 잔치를 베풀며 국내에 대사령을 내리고 박제상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책봉 그의 딸로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았다.
오랜 뒤 제상의 부인이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어서 마침내 치술신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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