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배리 삼릉(拜里 三陵) - 박씨왕의 능이라 전하는 3기의 능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북 경주시 배동 73-1

남산에서는 드문 울창한 송림속에 박씨왕의 능이라 전하는 3기의 능이 있다.
맨앞의 능이 제8대 아달라왕릉, 가운데는 제53대 신덕왕릉, 뒤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제54대 경명왕릉이다.

이 무덤들은 원래 봉분둘레에 큰 호석을 둘러놓은 제29대 태종무열왕릉과 같은 양식이었는데 지금은 다 파괴되어 원형토분처럼 보인다. 그중 가운데 제53대 신덕왕릉은 1963년 7월에 도굴되어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에 근무하고 있던 박일훈에 의해 조사보고 된 일이 있어서 신라왕릉과 석실분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구조를 보면 할석(割石)으로 쌓은 석실분으로 평면이 정방형에 가깝고 남벽중앙에 비교적 긴 이중의 연도가 달렸는데 천정이 재래식 굴뚝처럼 높이 올라간 형식이다. 현실내에는 연도와 직각되게 넓고 높은 관(棺)를 만들고 그 위에 긴 판석 2매를 놓아 시상(屍床)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북벽과 연접한 동.서벽에 연도천정 높이만하게 장방형구획을 만들고 상하로 나누어 白.黃.朱.靑색을 칠함으로서 마치 병풍을 둘러친 것과 같은 효과를 내었다.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신덕왕릉의 구조는 경주시내 노서동에 있는 3기의 석실분과 충효리고분군. 서악리석실분등과 같은 계통을 보이고 있어 이 왕릉이 통일기전후의 고분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중에 조선시대 경주부 망성리에 살았던 선비인 화계유의건이 남긴 화계집(花溪集)이란 문집이 있다. 이 문집 안에'신라왕릉진안설'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조선 영조 6년 경술년(1730)에 경주부윤으로 있던 김시형(金始炯)이 박씨문중과 타협하여 소전(所傳)을 잃어버린 왕릉을 찾는 작업을 행하였다고 한다.

당시 양문중은 남산을 기준으로하여 동남산에 위치하고 있는 능들은 김씨왕의 능으로 하고 선남산일대에 있는 능들은 박씨왕의 능으로 하였다. 이 작업으로 경술년이후에 등장한 왕릉은 모두 17기로 그 이전의 11기를 포함 28개의 능이 소전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정부에서 사적으로 지정한 것들이 영조 당시 나타난 왕릉을 그대로 받아들여 지정한 것으로 하계의 고고학적 검토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17기의 왕릉들 앞에는 작은 능표석이 서있는데 이것들은 대개 영조때의 것이다.

댓글

최신글 전체

이미지
제목
글쓴이
등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