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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묘 -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묘

by 넥스루비 2007. 8. 7.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1∼8리 산22-2

조선< 朝鮮 > 말기< 末期 >에 개혁 정치를 실시한 흥선대원군 이하응< 李昰應 >(1820∼1898)의 묘이다. 그는 고종< 高宗 >황제< 皇帝 >의 생부< 生父 >로서 자< 字 >는 시백< 時伯 >, 호< 號 >는 석파< 石坡 >, 시호< 諡號 >는 헌의< 獻懿 >이다. 철종< 哲宗 >이 1863년에 승하< 昇遐 >하자 후사< 後嗣 >가 없었으므로 신정왕후< 神貞王后 > 조씨< 趙氏 >에 의해 그의 둘째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이 되어 섭정< 攝政 >을 하게 되었다. 그는 국내외가 복잡다단하던 때 과감한 서정개혁에 착수하였다.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외척 세도를 일소하였으며 서원을 철폐하여 당쟁의 폐를 없애는 데 노력하였다. 『대전회통< 大典會通 >』 등 법전을 완비하여 중앙집권적 정치기강을 확립하고, 비변사< 備邊司 >를 폐지하여 의정부< 議政府 >의 기능을 부활시키고 삼군부< 三軍部 >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다. 세제를 개혁하여 국고를 충실히 하였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경복궁< 景福宮 >을 중건하였다. 한편으로는 천주교를 탄압하였고, 서양세력의 침략에 대비하여 서양의 통상 요청을 거부하고 1866년에 프랑스군(병인양요< 丙寅洋擾 >)이, 1871년에 미군(신미양요< 辛未洋擾 >)이 각각 강화도< 江華島 >로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시켰고, 일본의 국교 교섭 요구도 거부하는 강경한 대외정책을 폈다. 그는 집권 10년 만에 명성황후< 明成皇后 >와의 알력으로 1873년에 은퇴하였다. 그후 1882년 임오군란< 壬午軍亂 >이 일어나자 다시 집권하였으나, 청< 淸 >나라에 강제 납치되어 텐진< 天津 >에 4년간 갇혀 있기도 하였다. 묘는 1898년 고양군 공덕리에 모셨다가 1906년에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 移葬 >되었으며, 1966년에 다시 현 위치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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