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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남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산 58

묘당도는 고금도에 딸린 섬으로 그 거리는 20리 안팎이다. 임진,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1598년(서조 31) 2월 17일 충무공 이순신이 수군 8,000여 명을 거느리고 고하도(현 목포시 충무동)로 부터 이곳에 옮겨 진을 쳤고, 그해 7월 16일에는 명의 원병으로 수순독 진린이 배 500여 척으로 고금도에 도착, 연합전선을 펴 왜적의 침략을 막아냈던 유적이다. 특히 이곳은 해수로의 요새지로써 이충무공이 고금도에 진을 옮긴 뒤부터는 장흥 등지를 근거로하여 살륙과 약탈을 일삼던 왜군이 순천방면으로 도주해 버림으로 전투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데 공은 이 땡 우선 본영을 건설한다든지 피난민들을 거두어 둔정 하는 일 등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공이 고금도에 이르렀을 때는 군의 위세도 장했거니와 섬 안의 민가만도 수만호에 달해 옛날 휴산도 시대보다 오히려 10 배나 되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똰 이충무공이 고금도에 진을 치고 있던 8월 18일 임진왜란의 원 흉인 풍신수길이 사망하였다. 그러나 아군은 그의 사망을 알지 못 했으며 다만 왜군이 철귀하려 한다는 낌세를 알고 조명군은 이들 에 대한 적극적인 추격태세를 갖추기로 했다. 그리하여 우리 연합 함대는 9월 15일 고금도를 떠나 좌수영 방면으로 이동을 서둘렀 다. 실로 충무공이 2월 18일에 이곳에 도착해서 7개월만이다. 그후 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여 이곳으로 사체를 봉안하였다가 아산으로 옮겼다. 이 사당의 유래를 보면 이 자리에 본시 명군의 도독 진린이 이곳에 거할 때 사당을 짓고 관왕(관우)을 배향했었는데 그 후 현종 때 절도사 유배연이 중수하고 천휘란 승으로 하여금 그 곁에 암자를 짓고 이에 제사케하는 한편 딴 채 하나를 지 어 충무공과 함께 진린을 모시게 했다.
그 뒤 정조 때 왕께서 탄 보묘란 사액을 내리고 뒷날 왕명으로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명의 부총관 등자룡을 아울러 배양케 하고 암자 이름도 옥천사라 고쳤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다시 수난을 당하게 되어 제사도 끊기고 말기에는 관우의 상까지도 바닷물에 던져 졌으나 불상만은 건져 다른 사찰로 옮겨졌다. 해방 후 관왕묘 옛자리에 충무사를 새로 짓고 충무공을 모셔 제사를 지내고 있다. 경내에는 공의 영당과 숙종 39년(1713)에 세운 사적비가 있으며, 명나라 수장이 충무공의 전사를 애석히 여겨 여기서 서혈하고 귀국하였다는 내용의 비석이 있다. 주요 건물로는 사당과 부속건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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