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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관 칠의사묘 - 석주관 칠의사묘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남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산171

이 곳은 선조 31년(1598년) 정유재란 때 지방의 무명인사들이 의병을 일으켜 석주관을 사수하다가 다수의 적군과 싸우다 비장하게 전사한 의사 7인을 모신 무덤이다. 석주관은 전라도와 경사 도를 연결하는 지리산의 요새지이다. 이 곳을 튼튼히 방어만 하면 진주에서 남원을 향해 넘어오는 적을 분쇄할 수 있는 호남의 전략지이다. 임란 직후 방어사 곽영이 운봉팔양현과 함께 이곳에 성을 쌓았고 이듬해 계사년에는 전라관찰사 이연암의 건의에 의하여 구례 현감 이원춘을 석주관마호에 겸임케 했다. 정유재란에왜장 행장과 의지 등이 수만대병으로 이 곳에 들이닥치자 이원춘은 소수의 군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남원으로 가서 명장 총병 양원과 합세하였으나 적에게 남원이 함락되자 아군이 전멸되고 다른 방병과 함께 이원충도 전사했다. 이 때 구례의 사인 왕득인은 장정 수십명을 거느리고 나서 석주관 사수를 위해 숙성치에서 유격장 조경남을 만나 다시 백수십명을 모집, 석주관을 지켰다. 무기도 없는 백영명으로 진주에서 오는 적의 대부대를 만나 이쪽에서는 거의 맨주먹으로 대항하다가 마침내 장렬한 전사를 했다. 적들이 구례의 부락 에 들어와 방화, 약탈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현내 사인 이연익, 한 호성, 양응록, 고정길, 오종은 수백의 의병을 모집하여 다시 석관 주에 모였다. 이 때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도 역시 아버지의 죽음 을 듣자 곧 복수라는 두 글자를 기면에 대서하여 들고 이 대열에 참가하였다.
육의사는 화엄사로부터 승병 153명과 양미 103석을 얻어 형세가 강화되었으나 무기 공급이 없어 박달나무 곤봉으로 적이 총과 맞섰다. 수목을 베어 길에 쌓고 절벽에서 암석을 굴려 적의 전진을 막았다. 한편 이연익, 고정길, 오종은 본관을 고수하고 안호성, 양응록은 매복하고 왕의성은 산정에 올라 포진하였다. 수목에 막혀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적들은 이쪽 의병들의 맹공을 받아 많은 사상자를 냈고 다른 적들도 우리 복병의 기습으로 섬멸 을 당했다. 그리하여 냇물은 피 빛으로 변했고 이 때문에 이 곳을 피아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 봄, 적군의 대거내공 을 당해 결사적으로 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천여 의병고 150 여 승병이 일시에 무너지니 모두 함께 순절했다. 순조 4년(1804년) 에 나라에서 7의사에게 각각 관직을 추증하고 1946년 지방인사들 이 7의각과 영모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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