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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비 :: 충무공의 전공비. 이순신 명량대첩제

by 넥스루비 2007. 10. 28.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1186-7

우리나라의 남쪽 바다와 육지가 가장 먼저 만나는 해남 땅 우수영관광지 일원에서는 오는 10/26일부터 28일까지 명량대첩제가 열린다.

세계 해전 사항 유례없는 대전승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는 이번 행사는 명량대첩 당시의 해상전투 모습과 특별 건조된 조선 수군의 무적함대 판옥선을 관람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 거리체험, 대나무 활쏘기, 야죽불 체험, 판옥선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행사가 진행돼 410년전 역사 현장이 재현되는 감동을 맛볼 수도 있다.

명랑대첩제가 열리는 해남은 윤선도 유적지 녹우당, 백제시대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대흥산과 달마산에 고즈넉하게 위치한 미황사 등 많은 관광지가 산재해 있어 가을철 순천만과 더불어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지역이다.

아울러 해남 청정 해역에서 건져 올린 해산물로 끓인 시원하면서도 얼큰한 해물탕은 해남 관광의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에 1688년(숙종 14) 건립된 명량대첩기념비이다.
일제(1942년)때 일인들에 의해 강제 철거되어 경복궁에 옮겨졌던 것을 1950년 3월 다시 이곳 충무사에 복원하여 비각 건립하였다.

'통제사 충무이공 명량대첩비'의 12자는 김만중(金萬重)의 전서(篆書)이고, 문장은 이민서(李敏敍), 글씨는 이정영(李正英)의 해서이다. 비문은 1686년 쓰여졌으나 비는 2년 뒤인 1688년 3월 전라우도수군 절도사 박신주(朴新胄)에 의해 세워졌다.

이 비를 세운 것은 명량대첩이 있은지 91년이 되는 해이다.
비문은 만력25년 정유(1597년) 9월에 이충무공이 우수영 월편인 진도벽파정 아래에 설진하여 바다의 급류를 이용, 일본군의 선단을 격파한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충무공의 전공비는 남해노량, 고금 도, 여수, 통영, 아산 등 수개 지역에 세워졌으나 일제의 박해로 인하여 그 일부는 적지 않은 피해를 받았었다.

조선시대 석비 일반이 갖는 형식이며 방형 지대석과 장방형 비좌석을 겹친 위에 신석을 꽂고 운룡문이 세겨진 장방형 옥개석을 얹은 것이다.

※명량대첩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 12척의 배로 133척(다른 기록에는 300여척)의 일본수군을 명량(울돌목)에서 대파한 해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균(元均)이 거느린 조선수군은 대부분 패하고 말았으며 그해 7월 22일 유성룡(柳成龍) 등의 간곡한 건의로 다시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휘하 군사들의 전열을 재정비 하였으나 남아있던 전선(戰船)은 겨우 12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일본 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를 공략하고 있었고 이의 저지를 위해 9월 15일 우수영으로 진을 옮겨 울돌목의 물때를 맞추어 공격하기로 작전세움. 16일 아침 일본 수군은 명량으로 지입. 정조시기(停潮時期)를 기다려 一자형으로 일본군의 수로를 차단, 저지하려 하자 일대 혼전이 전개되고 조류는 서서히 남동류(南東流)로 바뀌어 소수의 아군에 비해 대군의 일본군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여 진형과 대오가 무너져 크게 패함. 한편 열세한 병력을 지휘한 이순신은 위장전술로써 피난선 100여척을 전선으로 위장하여 뒤에서 성원하게 하였다는 것과 철쇄(鐵鎖)를 협수로 깔아서 적선을 전복시켰다는 기록도 일부 전해오고 있다.(철쇄는 일본 동경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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