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군 남면 유마리 421-1
유마사는 중국 당나라 사람 유마운이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나 믿기 어렵다. 또 일설에는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해연사라 하였다고도 전한다. 현재의 건물은 6·25때 모두 소실된 후 복건된 것이다. 원래 이 부도는 유마사 입구 서록에 소재하였던 것을 1981년 현 위치로 옮겨 온 것이라 한다. 부도의 세부양식을 보면 지대석은 팔각으로 상면에 각호각형 3단의 괴임대를 마련하여 1석으로 하였으며 하대석은 팔각의 각 면에 안상을 새기고 그 위로는 측면에 팔각의 도출대를 둘렀다. 상면에 역시 각호각형의 3단 괴임대를 조출하여 하대로 삼았다. 중석 받침의 부연은 팔각으로 각 면에 귀꽃을 조각하여 화문을 장식하였고 그 위로는 16엽 중판을 양각으로 새겨 각호각형의 3단 괴임대에 이어지고 있다. 중석은 팔각이며 하단에 팔각 도출대를 두르고 각 면에는 큼직한 안상을 새겨 하면에 3단의 각형 받침과 8판의 연호문이 각출된 앙연의 상대석 을 받치고 있다. 탑신은 팔각으로 각 면에 우주를 모각하였으며 전면에는 문호형에 열쇠통을 후면에는 「해연지탑」이란 명문을 음각했다. 옥개석은 넓고 평박한편으로 상면에 기왓골이 없이 우동이 뚜렷하고 하면은 수평인데 엷은 3단의 받침을 마련하였다. 상륜은 유실되고 없다. 이 부도는 통일신라 9세기경에 발달한 팔각원당형의 전형양식을 그대로 고수한 예로써 쌍봉사의 철감선사부도가 바로 인근에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조성 연대는 고려 시대 초반기로 추정된다.
유마사는 중국 당나라 사람 유마운이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나 믿기 어렵다. 또 일설에는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해연사라 하였다고도 전한다. 현재의 건물은 6·25때 모두 소실된 후 복건된 것이다. 원래 이 부도는 유마사 입구 서록에 소재하였던 것을 1981년 현 위치로 옮겨 온 것이라 한다. 부도의 세부양식을 보면 지대석은 팔각으로 상면에 각호각형 3단의 괴임대를 마련하여 1석으로 하였으며 하대석은 팔각의 각 면에 안상을 새기고 그 위로는 측면에 팔각의 도출대를 둘렀다. 상면에 역시 각호각형의 3단 괴임대를 조출하여 하대로 삼았다. 중석 받침의 부연은 팔각으로 각 면에 귀꽃을 조각하여 화문을 장식하였고 그 위로는 16엽 중판을 양각으로 새겨 각호각형의 3단 괴임대에 이어지고 있다. 중석은 팔각이며 하단에 팔각 도출대를 두르고 각 면에는 큼직한 안상을 새겨 하면에 3단의 각형 받침과 8판의 연호문이 각출된 앙연의 상대석 을 받치고 있다. 탑신은 팔각으로 각 면에 우주를 모각하였으며 전면에는 문호형에 열쇠통을 후면에는 「해연지탑」이란 명문을 음각했다. 옥개석은 넓고 평박한편으로 상면에 기왓골이 없이 우동이 뚜렷하고 하면은 수평인데 엷은 3단의 받침을 마련하였다. 상륜은 유실되고 없다. 이 부도는 통일신라 9세기경에 발달한 팔각원당형의 전형양식을 그대로 고수한 예로써 쌍봉사의 철감선사부도가 바로 인근에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조성 연대는 고려 시대 초반기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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