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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목관아지 - 제주도에 내려온 목사가 거주하던 곳으로 조선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

by 넥스루비 2007. 8. 7.

제주 목관아지는 조선 숙종 29년(1703)에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이 제주도의 방어·군민·풍속 등을 친히 살피면서 순력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과 설명집인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나 고득종<高得宗>의 홍화각기<弘化閣記>(세종 17년, 1435) 등 많은 문헌기록을 통해서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으며 발굴조사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에 이르는 여러 문화층과 함께 제주목 관아의 주요시설이었던 동헌<東軒>·내아<內衙> 건물지 등의 위치와 규모를 확인함으로써, 이 곳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주도의 중심지 역할을 한 중요한 유적지였음이 밝혀져, 유적지 남서편의 관덕정<觀德亭>(보물 제322호:'59.3.9 지정)을 포함하여 이번에 새로이 사적으로 지정·보존하게 된 것이다. 관덕정은 정면 5칸, 측면4칸의 이익공<李翼拱> 집으로서 처마가 긴 것이 특징인데, 조선 세종 30년(1448)에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창건되어 그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 제주시의 명물이다.

전체적으로 유구의 중복관계와 건물지의 石材, 축조형태<築造形態>로 보아 이 유적의 시설물군은 크게 세 번에 걸쳐 건축되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시기는 완전히 가공하지 않은 현무암제 할석형성재를 사용하여 대부분의 건물을 시설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에 속하는 담장지는 다듬은 판석을 이용하여 하단을 시설하고 그 위로 기와와 점토를 번갈아 쌓아 올린 와적<瓦積>담장지로 확인된다. 이 담장지는 건물지 외곽 테두리 담장지와 건물간의 경계 담장지로 대별되는데, 건물지간의 담장지에서는 협문지가 확인된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건물지외에 깊이 3m 이상의 원형우물지가 확인된다.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소수의 청자편과 분청 그리고 여말선초 명문기와가 있다. 이 시기에 초창기 관아터의 골격이 만들어 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건물은 화재로 훼손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소토층과 「洪化閣記」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두 번째 시기는 판석, 할석을 주로 사용하되, 일부 건물지는 제주도 현무암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여 기단석렬을 축조한 건물지군을 있던 시기이다. 건물지의 축조기법으로 보아 급하게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시기 건물지의 평면 중복상태가 가장 심하게 나타났다. 담장지는 대부분 냇돌과 괴석을 주로 사용하여 축조하고 있어, 전 시기의 와적담장에 비해 허술하고 급하게 만들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유구에서 출토되는 도자기편은 다음시기의 유구에서 출토되는 도자기편과 시기차가 거의 없고 자갈층 간층으로 구분되는 상층의 건물지와 높이차가 적어, 아마도 건물지군의 존재 시기가 짧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세 번째 시기는 濟州牧官衙가 자리했던 건물군락 중 가장 화려한 건물군이 존재했던 시기로 판단된다. 이 시기 시설물은 층위상 맨 상층의 자갈층과 점토층에 시설되어 있었으며, 발굴구역내에서 이 시기에 해당하는 유구는 거의 노출되었다. 반듯한 판석형 기단석렬과 정교하게 다듬은 원형 주춧돌, 2∼3중의 壇(단), 할석위주로 쌓아 올려 진흙을 바른 담장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의 건물지는 일제시대와 현대를 거치면서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으나 그래도 가장 잘 남아 있는 상태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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