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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본문

문화ㆍ행사/문화재

병산서원 -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여행정보 넥스루비 2016.09.22 20:16

병산서원은 1613년(광해3년)에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 조선중기 문신으로 류성룡의 문하)등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현 위치에 존덕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곳이다.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고려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풍산 류씨의 교육기관이었는데 1572년(선조 5년)에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겼다. 1610년에는 풍악서당을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662년(현종3년)에 서애의 세째아들 수암 류진(修巖 柳袗, 1582~1635)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863년(철종 14년) '녕산'이란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1868년 대원군 선원 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경내에는 존덕사(尊德祠), 입교당(立敎堂), 신문(神門), 전사청(典祀廳), 장판각(藏板閣), 동재(東齊), 서재(西), 만대루(晩對樓), 복례문(復禮門) 그리고 교직사인 주소(廚所)등이 있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향사를 지낸다.

병산서원에는 류성룡의 문집을 비롯하여 많은 서책과 고문서들이 소장되어 있으나 현재 이것들은 하회 충효당의 영모각에 따로 보관하고 있다.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몽진해 오다가 난리중인데도 서생들이 학업에 열중하고 있음을 보고 이를 가상히 여겨 서책을 하사하고 땅을 사패지(賜牌地로) 내주어 격려하였으니 이것이 병산서원을 일으키는 토대가 된 셈이다.

그러나 병산서원도 대원군 집정시에 훼철될 위치의 언저리에 서 있었다. 이를테면 인근의 또 다른 서원인 도산서원의 경우는 이미 선조 8년(1575년)에 사액을 받아 대원군이 집정한 1864년 당시 이미 3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으나 병산서원의 경우 철종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863년(철종 14년)에 사액을 내리라는 윤허만이 있었을 뿐 시행은 되지 못한 상태에서 국왕이 이 해 12월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사액이 완료된 상태가 아닌 상황에서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을 어떠한 처분이 내려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다급한 상황이었다. 이때 서애의 8대손이며 수암의 7대 주손인 낙파 류후조(洛坡 柳厚祚, 1798∼1876)의 활약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된다. 낙향한 노대신(老大臣)의 논리정연한 병산서원 철패 불가론은 대원군으로선 거절할 명분도 없었거니와 서애선생에 대한 존경심도 한몫을 했을 터이다.

지난 1995년에 늦게 간행된 「낙파집(洛坡集)」에 수록된 이른바 '상대원군 별지(上大院君 別紙, 대원군에게 올린 별지, 무진년 1868년, 고종 5년)이다. 해방후 공민왕으로부터 받은 사패지와 기타 서원소유 전답과 임야 등 서원 전 재산을 기금으로 하여 학교법인 '병산교육재단'을 만들고 풍산읍에 풍산중학교와 풍산종합고등학교를 열어 풍악서당에서 병산서원으로 학문을 숭상한 서애의 호학정신을 기리고 있다.

※서애 류성룡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柳仲영, 立巖公, 풍산류씨 12세)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 1538∼1593)과 더불어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에게 동문수학한 수제자. 1564년(명종 19)에 생원, 진사가 되고 다음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25세인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를 첫 벼슬길로 하여 승문원(承文院),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등 주로 학예직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뛰어난 학문과 공정무사한 정치적 역량으로 선조에게 발탁되어 1582년(41세)에는 대사간(大司諫, 정3품 당상관), 우부승지(右副承旨),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종2품관(從二品官)인 대사헌(大司憲)에 올랐다. 1590년에 우의정에 승진, 다음해 이조판서를 겸하여 좌의정에 이른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영의정으로서 반대파의 집요한 탄핵을 받아 모든 관직을 삭탈당한 서애는 향리인 하회에 은거하면서 물건너 부용대(芙蓉臺) 동쪽의 옥연정사(玉淵精舍, 1586년에 공이 세움)에서 저술과 휴양생활에 든다.

부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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