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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사 광자대사비 - 태안사 광자대사비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현재 탑신은 파괴되어 일부 잔편의 각자 역시 마멸, 결획으로 판독이 불가능하다. 다행히 조선금석총람 해동금석원 소재 전문이 결자가 있기는 하나 수록되어 있어 대강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비제는 「유당고려국무주고동리산대안사교시광자대사비명병서 (有唐高麗國武州故桐裏山大安寺敎諡廣慈大師碑銘 序)」자경 2.4cm 행서체이며 비문 역시 행성체이다. 찬자는 손소(孫紹), 서자는 불명이다. 「대사법휘충다, 자법신경사인(大師法諱充多, 字法信京師人)」이며 고비는 박씨, 함통5년(서기 864년) 4월 5일 생이다. 팔세에 출가, 제산(諸山)을 유력(遊歷)한 후 「주회발섭어요동(周廻跋涉於遼東)」하고 동리산 상방화상 문하로 들어가있다가 가야 갑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효공대왕의 측근에서 불시에 대한 문답을 한 일고 고려 태조로부터는 극진한 대우를 받았음을 비문은 기록하였다. 문중에 「구중대사(九重大師)」라는 내용이 있으나 이 부분은 상하가 모두 결자가 되어 자세한 것을 알 수 없 다. 대사 개운2년 즉, 고려 혜종2년(서기 945년) 세수 82, 불랍 66으로 입적했다. 또 문미에는 「광덕이년세차경술시월십오일 전자(光德二年歲次庚戌十月十五日 鐫字)」라 했으므로 이 비는 광종원년(서 기 950년) 대사 몰후 5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귀부는 목이 짧으나 귀두와 전면의 조형이 사실성을 띠었고 귀배 비좌의 4주 측면에는 연속 와문(渦紋)을 조식하였으나 당초문인지 운문인지를 가리기가 어렵다. 이수의 사방 우각에는 이룡의 두부 가 조출되었고 제액상부 중심에는 극락조로 보이는 조형이 부각되었다. 이런 「칼라빈가」류의 조각은 연곡사 북부도나 동부도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제부의 조형은 기왕에 미약하게 다루어진 부분에 대한 장식, 장엄을 광대 다양화한 참신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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