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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제3전시관(일제침략관) - 일제의 침략과 만행의 실상이 전시

by 넥스루비 2007. 8. 7.
충남 천안시 목천면 남화리 230번지

고대로부터 우리에게서 문화를 전수받았던 일본은 19세기 중엽부터 서구의 문물을 들여와 제국주의화 하면서 개항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력을 앞세워 각종 기만적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여 정치, 군사, 경제, 문화적 침략을 증대시키면서 점차 내정까지 간섭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적 근대화를 방해하였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우리 정부가 요청하지도 않은 군대를 불법 침입시켜 청일전쟁을 도발하였고, 이듬해에는 그들의 침략 정책에 장애가 된다고 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또한 이에 항거하여 일어난 의병들을 체포, 학살하고 이른바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1904년에는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러일전쟁을 도발하였고 우리 정부에 대해 전쟁 협력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이듬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일본군에게 왕궁을 포위토록 하고 '을사5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비준도 받지 않은 채 외교권을 비롯한 국권의 일부를 빼앗았다. 그리하여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를 고립시키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에 간섭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고종)가 조약의 무효와 독립의 의지를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했을 때 일제는 이를 방해하여 무위로 그치게 하였으며, 오히려 이를 구실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켰고 군대도 해산하였다. 이어 1910년에는 우리나라를 병탄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잔혹한 것이었다. 1910년 이후 10년간 헌병을 앞세운 무단통치로 한국민의 언론, 집회, 결사 등 모든 자유를 박탈하고, 독립운동에 대한 비인도적 탄압을 자행하였다. 또한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한국민의 토지를 약탈하였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앞세워 일본인 이주자에게 이를 분배하였다. 이외에도 산림자원, 지하자원, 수산자원을 수탈하였고, 1920년대로 들어 오면서 일본 자본주의가 팽창함에 따라 공업화에 따른 값싼 식료품과 노동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강요하였다. 또한 일제는 우리나라를 영구히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민족 말살 정책을 실시하여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왜곡 파괴하고 우리말과 글도 못쓰게 하였으며 우리의 성명까지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하였다. 또한 신사참배, 황국선민 서사 암송을 강요하는 등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고자 광분하였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군분 파시즘 정권을 완성하여 만주침략, 상해침공,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여러 전쟁을 도발하고 우리 민족의 물적 인적자원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만주와 중국본토, 북으로는 이츠섬에서부터 남태평양, 필리핀, 버어마, 인도네시아 등지에 강제 징용 징병 되었고, 부녀자들까지 '여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로 희생당했다.

이 전시관에는 무력을 앞세운 일제의 한국 침략 과정과 식민통치 기간 중 우리 민족에 가한 잔혹한 탄압과 각종의 가혹한 경제수탈, 그리고 우리 민족을 없애려던 민족말살의 흉계와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미지설명(이미지를 클릭하면 고유번호가 보입니다)
(1)참략책동, 무력침략 (2)국권강탈 (3)명성황후 시해장면 (4)고난극복의 한국인 상 (5)식민통치 (6)애국지사 연행장면 (7)고문체험의 장 (8)고문장면 (9)태형틀과 태 (10)종합영상실 (11)자료검색실 (12)경제침략, 수탈 (13)민족문화말살 (14)강제징용 및 징병 모형 (150말기수탈 (16)일제침략 관련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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