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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제4전시관(3ㆍ1운동관) - 국내외 독립운동과 3ㆍ1운동 관계자료

by 넥스루비 2007. 8. 7.
충남 천안시 목천면 남화리 230번지

1901년 우리 국권을 강탈한 일본은 우리 민족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모든 자유를 박탈하고 헌병 경찰을 앞세운 무단지배를 자행하였다. 이에 많은 우리 애국지사들은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한편 국내에서는 군자금 모금, 부일배 처단 등 지하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8년 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인도주의와 민족자결주의 사상이 전세계를 풍미하게 되자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 일제가 독살했다는 소문과 함께 광무(고종)황제가 갑자기 승하하여 나라 잃은 설움과 울분이 터져 오르게 되었다. 이 때를 타서 1919년 3월 1일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지도자와 학생층 대표들이 우리 나라가 독립국이며 우리 민족은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서울, 평양을 비롯한 여러 지역을 시작으로 독립만세시위에 들어 갔다. 독립만세시위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 그해 5월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연인원 200만 명이 참가하는 전민족적인 시위로 발전되었고, 국내 뿐 아니라 만주, 러시아 연해주, 미주, 일본까지 우리 동포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일제는 총칼로 무자비하게 탄압하였지만 그러한 탄압속에서도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지닌 민족으로서의 자부심과,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하는 불굴의 자유정신을 전세계에 보여 주었다. 독립선언과 전민족적인 항일 독립 만세시위는 곧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고 국내외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국내에서는 농민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문화운동 등 사회 각계 가층에서 다양한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독립군의 무장투쟁이 본격화되어 수많은 독립군 단체와 부대가 활동했으며, 미주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외교활동과 자금모금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3ㆍ1운동은 일제로 하여금 우리 민족은 총칼로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무단통치를 소위 "문화정치"라는 것으로 완화시키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또한 중국의 5ㆍ4운동, 인도의 국민의회파 운동,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약소 피압박 민족의 독립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후 우리 동포들은 광복의 그날까지 해마다 3월 1일이 되면 3ㆍ1운동 기념식을 갖고 3ㆍ1정신을 재천명하고 독립쟁취의 결의를 다졌다.

이 전시관에는 3ㆍ1운동의 배경이 되는 1910년대 생활상, 독립운동을 비롯하여 3ㆍ1운동의 발발과 전개, 이에 대한 일제의 탄압, 이 운동이 미친 영향 등 민족 최대의 항일 독립운동의 전모를 보여 준다.

*이미지 설명(이미지를 클릭하면 고유번호가 보입니다)
(1)3ㆍ1정신상 (2)1910년대 생활상 매직비젼 (3)삼천리 방방곡곡에서 (4)독립선언 (5)태극기 등사 모형 (6)만세 시위 모형 (7)일제의 탄압 (8)유관순 옥중 투쟁 (9)해외 3ㆍ1운동 (10)종합 영상 (11)3ㆍ1운동의 전파 (12)터치 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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