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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기념관 - 백산 안희제 선생의 항일 독립운동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관

by 넥스루비 2007. 8. 7.
부산 중구 동광동

중구 동광동의 동광초등학교 동쪽 아래 백산거리에 있는 옛 백산상회는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1910 ∼ 20년대에 이르는 사이 백산상회가 설립되었던 자리이다. 백산상회 설립자인 백산 안희제는 1885년 8월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한학 공부를 하였고, 서울에서 양정의숙과 보성전문학교에서 신학문을 닦았다.

백산은 중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1914년 국내로 들어와 본인과 가족소유의 논밭을 팔고 영남지역 지주들의 자본인 민족자본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인 무역회사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일본자본이 거센 부산지역에서 그들에 맞서 무역업을 펼쳤다.

백산상회는 국내와 중국, 특히 만주지역으로 연계가 되는 지사격인 상회를 형성하여 상호간의 거래의 원활을 꾀했다. 그 거래는 국내산 곡물과 만주산 곡물이 주가 되었는데 그러한 무역 루트 형성을 당시 백산상회가 펼친 독립운동가의 상호 연락과 연계의 길이 되었다. 그 길은 또 무역으로 얻어진 이윤과 주위에서 모아진 독립운동자금이 전달되는 루트역할을 했다.

독립운동자금 가운데 가장 많은 금액이 제공된 곳은 중국 상해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백산상회는 독립자금의 조달뿐 아니라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일 육영사업이 계획되고 실천되었으며, 민족정신을 결집시키는 중추지가 되었다. 백산 안희제는 부산에서 백산상회란 무역상의 간판 아래 경제인으로 가장하여 일본의 정치와 행정기관에까지 침투하여 그들의 부정과 비리를 들추면서 우리의 권익과 인권신장에 이바지함도 컸다.

그는 『중외일보』를 발간하는 등 민족정신을 진작시켰다. 백산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날로 더해가자 1933년 백산상회를 해산하고 다시 만주로 가서 목단장 주변에 투쟁의 거점을 옮기고, 발해농장을 만들어 그곳 동포의 생활기반을 마련함과 동시에 무력투쟁을 위한 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한편, 대종교를 통한 투쟁력 강화에 힘쓰다가 1942년 11월 국내잠입 중 체포되어 만주의 목단장 경무청에 압송되었다. 9월에 걸친 혹독한 고문으로 빈사상태에 이르러 병보석된지 반나절 뒤인 1943년 8월 3일 운명하였다.

1995년 8월 15일 부산시 중구청에서는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옛 백산상회 자리에 지상 2층의 "백산기념관"을 개관하여 선생의 생전의 활동상과 관련유물 및 각종 서적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또한 백산의 항일독립정신을 이어받은 산교육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백산의 흉상은 용두산공원내 용탑 옆에 세워져 있다.


[승용차]
● 부산역에서
부산역→중앙동→부산우체국에서 우회전→대청동→공영주차장

구 광일초등학교(폐교)가 대형 공영 주차장이 되었음. 여기에 주차, 도보 5분.

[대중교통]
● 시내버스
* 해운대 방면(중앙동)/ 40, 139, 140
* 서면 방면(중앙동)/ 17, 17-1, 35, 52-1 81, 82, 85, 87, 88, 89, 103
* 부산역 방면(대청동)/ 40, 42, 59, 81, 140
※ 부산역에서는 중앙동까지 거의 모든 버스 경유

● 지하철
1호선 중앙동역 하차

●중구 부산우체국에 하차하여 대청로 방면으로 있는 육교를 건너면 공영주차장이 있다. 여기서 타워호텔방면으로 걸어가면 왼편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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