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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포수군만호진성 - 중종 5년의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염포에 있었던

by 넥스루비 2007. 8. 7.

울산 북구 염포동

염포(浦)에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을 두게된 것은 태종 17년 6월 갑진(甲辰)부터였다.
그후 세종 8년 4월 무진(戊辰)에는 수군도만호진(水軍都萬戶鎭)으로 대체하였다가, 세종 8년 11월 기해(己亥)에 다시 만호진을 두게 되었다.
중종 5년의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염포에 있었던 왜관도 폐쇄되어 왜에 대한 대비도 불필요하게 되어 중종 17년과 39년의 진관(鎭管)의 개편 때 염포의 만호진을 폐지하고 말았다.
성종조에 들어와서는 각 포(浦)에도 성보(城堡)를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까지는 여러 포의 수군은 만호의 지휘하에 양식과 병기를 군선에 싣고 선상근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염포에는 성종 15년 시월의 기록을 본다면 이때도 어떠한 형태의 축장(築墻)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向者薺浦釜山浦鑒浦萬戶在處 築墻備變此則倭人同處 恐有寒發之患
이러한 방비책을 세운 뒤에 염포에는 성종 21년 5월에 축성의 사업이 이루어졌다.
是月築慶尙道監浦城 高十五尺 周一千三十九尺
이때에 축성하였던 성은 높이 15자 둘레가 1,039자였다.
염포성의 위치는 성내마을과 중리마을의 경계를 따라 중리 뒷편 산복을 거쳐 옛 고려화학공장의 가운데를 돌아 해안을 따라 축조하였다.
그러므로 중리마을이 성안에 들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성터를 거의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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