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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천불전 - 조선후기의 다포양식임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

큰 대문채와도 같이 평범한 단층 5칸 맞배집의 가허루(駕虛樓)의 어간을 거쳐 천불전 내정에 들어서면 정면의 높은 축대위에 천불전 불당이 마주보이고 왼쪽에는 노전채 봉향각이 오른쪽에는 옛 강원이던 용화당이 마당 둘레를 에워싸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중기 이후로 성행한 다포계에 속한 전형적인 건물로 그 짜임새 매우 화려하고 우아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남원 중심곽의 가장 안정된 곳에 자리잡은 남원 유일의 법당으로 1811년(순조 11)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13년 완호(玩虎) 대사에 의해 재건되었다.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게 한 높은 기단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민흘림 기둥을 세워 창방(昌枋)으로 기둥 윗몸을 결구하고 이 위에 다시 평방(坪枋)을 놓아 공포(拱포包)들을 기둥과 기둥사이에도 놓아 다포식(多包式)을 이루고 있다. 공포의 짜임은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산미첨차(山彌 遮)의 끝은 앙서(仰舌)로 되었고, 이 앙서에 연꽃봉오리를 조각하였다. 특히 어간(御間) 기둥머리에는 용머리를 달았다.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으로 추녀가 하늘을 날 듯 솟아보인다.내부는 우물 천장을 하였으며 특히 고주를 사용하지 않았음이 특징 중의 하나라 하겠다. 이러한 건물의 내 부 구조는 아마도 천불을 봉안하기 위하여 공간을 충분히 사용하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창문은 중앙간에서는 삼분합이고 양간 좌우에는 이분합문으로 삼간의 모든 문이 빗꽃살문양을 하여 천불전이란 장식성을 나타내 고 있다. 상단에 교창을 두지 않았다.

화주 원호대사는 천불전을 재건하면서 쌍봉사 화승( 僧) 풍계(楓溪) 대사에게 천불조성을 의뢰하여 경주 불석산(不石山)에 가서 옥돌로 천불을 조성하여 이를 배로 운반해 온다. 순조 17년(1817) 11월 8일 경주 장진포(長津浦)에서 발선한 배 중 한 척이 폭풍을 만나 천불중 768좌를 실은 채 일본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에 표착. 다음해 7월 14일에 해남으로 돌아오는 사고를 겪는다.
그래서 순조 18년 8월 15일에야 천불을 천불전에 봉안하게 되었다(풍계대사의 「일본표해록」에서).

이 때 일본까지 표류해 갔다 돌아온 768좌의 부처님에게는 어깨나 좌대 아래에 일자(日字)를 새겨 넣어 표시하였다고 한다.
정면 불단 중앙에는 목조삼존불. 가허루(駕虛樓) 현판은 호남 명필 창암 이삼만(蒼岩 李三晩, 1770∼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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