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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재 - 호남 석학들이 시문을 교류하던 곳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남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495

천관산 북동쪽 영은동(靈隱洞) 기슭의 계곡에 있는 재각. 태고송(太古松)이라 불리는 노송과 도화교 등 주위경관이 뛰어나다. 천관산에서 길게 계곡물이 흐른다 하여 장천재(長川齋)라 이름지었다 한다.
장천재는 묘각이기 보다 호남실학의 대가인 존재 위백규(存齋 魏伯珪)선생이 강학하던 장소로서, 또 유림들이 시문을 나누던 곳으로 더 알려져 있다. 당대의 호남석학들이 이곳을 찾아 남긴 43편의 시문이 현판에 남아 있다. 위백규선생은 자를 자화, 호를 존재 또는 규암이다. 10세에 천 문,지리, 율력, 도불, 산수, 의학서를 열람하는 수재를 보였고 17 세 이후에는 주로 장천재에 기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70세의 노구에 현감의 벼슬을 지냈으며 목민의 경룬을 실천하는데 진력했다. 그의 저술로는 정현신보, 만언봉사, 사서유의, 지제지, 명사평, 상론, 본초강목 등 다수가 전한다.
이 곳은 방촌마을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해마다 문중 어른들이 섣달 그믐에 이곳에서 제야(除夜)를 지내고 초사흗날 문계를 지낼때까지 머물기 때문에 방촌마을 사람들은 이곳으로 찾아와 한꺼번에 문중어른들을 뵙고 일일이 세배를 올렸다. 여자들은 봄이나 명절에 장천재 마당에 모여 강강술래를 하거나 집단놀이를 했다. 이렇듯 방촌사람들은 누구나 장천재에서 생활했던 체험을 갖고 있다.

이 건물은 工자형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특이한 건물이다. 중앙 3칸에는 온돌방을 두고 양측 날개에는 대청, 온돌방, 난간을 두른 누마루를 배치했다. 팔계단의 장대석으로 짜올린 기단에 주초는 덤벙초석을 놓고 기둥은 원주를 세웠는데 포작이 없는 주두와 창방, 장여를 올려 결구하였다. 지붕은 중간 동곡(棟曲)이 ㄷ자형 양날개와 높이를 동일하게 하고 전면에서는 팔작지붕으로 합각이 보이며 배면에서는 맞배지붕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문은 중앙 3칸에만 설치했는데 3칸 모두 이분합(二分閤)이다.

이 건물은 고려 공민왕 21년(1372년)에 창건되었으나 훼손되었던 것을 조선 효종 10년(1659년) 장흥 위씨 들이 여기에 장천재를 세웠으며, 현 건물은 조선 말기(1870년경) 고종때 중건되어 그간 수차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천재의 방에는 고유한 방이름이 붙어 있다. 열락헌(悅樂軒), 추원루(追遠樓), 장천재(長川齋), 부계당(俯溪堂), 칙휴루(則休樓) 등이다. 장천재 후원 담장 위쪽에는 철융단지가 모셔져 있다. 철융단지는 보통집의 경우 장독대에 모셔 놓고 재를 올리는 가신(家神)의 하나로, 토주단지 신주단질 부르기도 한다. 민간신앙이 엄격한 유교문중의 교학소에 어울려 있는 것이 이채롭다.

근래에 장천재의 보존을 위해 붉은 페인트로 색을 입혔으나, 우리나라 고건축의 아름다움을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돈을 들여가면서 훼손한 것 같아 볼썽 사납다. 차라리 그냥 두는 것만 못하게 되었으니 안타깝다.

[승용차]
●광주(13번 국도) ⇒ 강진(2번 국도) ⇒ 장흥(23번 국도) ⇒ 관산읍 ⇒ 방촌마을 ⇒호동
●부산(남해고속국도) ⇒ 광양(2번 국도) ⇒ 장흥(23번 국도)⇒ 관산읍 ⇒ 방촌마을 ⇒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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