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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성지(統營城址) - 조선 숙종 4년(1678) 윤천뢰(尹天賚) 제57대 통제사가 쌓기 시작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남 통영시 문화동

통영성은 조선 숙종 4년(1678) 윤천뢰(尹天賚) 제57대 통제사가 쌓기 시작했다.
성의 둘레는 약 3,660m(11,730尺), 높이 약 4.7m(1丈半), 성가퀴 707개의 평산성(平山城)으로 북문 북쪽의 여황산 기슭에서 서문 북쪽의 산기슭까지여황산 양쪽 등성이 약 1km는 토성(土城)이고 나머지는 석성(石城)이다.

토성은 산등성이를 이용하여 기단부는 삭토식(削土式)으로 조성하다가 상부로 오면서 석심(石心)을 넣고 흙을 다지면서 사다리꼴 모양으로 쌓았다.

석성은 남문을 위시한 4대문과 2암문 양쪽에는 네모 반듯하게 다듬은 돌 무사석(武砂石)으로 협축(夾築)하였고 나머지 부분은 지세를 따라 사행(蛇行)으로 가면서 자연할석(自然割石)으로 바깥쪽을 [물림쌓기]공법으로 축성하고 안쪽은 흙과 잡석(雜石)으로 밋밋하게 쌓아올린 내탁공법(內托工法)을 취하였다.

1985년 통제영이 혁파된 뒤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가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에 성벽과 문루가 일제에 의해 훼철(毁撤)되어 지금은 토성의 유지와 석성의 부분이 몇군데 남아있을 뿐이다.

옛 통영성에는 4대문(大門:東·西·南·北)과 2암문(暗門), 그리고 3포루 (鋪樓:東·西·北)가 있었다.

4대문 가운데 동문은 홍예문(虹霓門)으로 문루는 축성 때에 함께 지었는데, 영조 24년(1748) 장태소(張泰紹) 제112대 통제사가 신흥문(新興門)이라는 이름의 편액을 만들어 문루에 걸었고, 정조 16년(1792) 이윤경(李潤慶) 제145대 통제사가 고쳐 지으면서 춘생문(春生門)이라 하였다. 위치는 태평동 623번지 고개마루의 도로 중앙으로 추정된다. 서문 역시 홍예문으로 축성 때에 함께 지었는데 정조 14년(1790) 신응주(申應周) 제144대 통제사가 고쳐 짓고 금숙문(金肅門)이라 하였다.
위치는 문화동 310번지 고개마루의 도로 중앙으로 추정된다.
남문도 홍예문으로 축성시에 지었는데 일명 청남루(淸南樓)라 하였다.
영조 12년(1736) 윤택정(尹宅鼎) 제105대 통제사가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고, 헌종 9년(1843) 허계(許棨) 제174대 통제사가 중수했다.
위치는 문화동 150-6번지 4거리 도로 중앙으로 추정된다.

북문은 통영성을 축성할 당시에는 문루가 없었으나 영조 47년(1771) 원중회(元重會) 제129대 통제사가 문루를 짓고 이름을 공북루(拱北樓)라 하였고, 일명 의두문(依斗門)이라 하였다.
동남의 두 암문(暗門)은 성을 쌓을 때 함께 만들었는데 문루가 없었다.
동암문은 일명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렸는데 그 위치는 중앙동 143번지 도로 중앙으로 추정된다.
남암문의 위치는 중앙동 143번지 도로 중앙으로 추정되는데 무슨 이유였던지 항상 잠가 두었다고 한다.

세 포루는 동·서·북의 산마루에 있었는데 숙종 20년(1694) 목림기(睦林奇) 제69대 통제사가 세웠다.

통영성을 방비하던 산성중군(山城中軍)이 순찰과 경비를 하던 초소로 때로는 장수가 이곳에서 군사들을 지휘하였기에 장대(將臺)라고도 하였다.
북포루는 여황산 정상에 있었는데 [북장대]라고도 불렀으며 1993년 2월에 복원되었다.
동포루는 성 동쪽 동피랑 꼭대기에 있었는데 [동장대]라 부르기도 했으며, 서포루는 성 서쪽 서피랑 꼭대기에 있었는데 [서장대]라 부르기도 했다.


[승용차]
● 경부고속도로→금호분기점→구마고속도로→내서분기점→남해고속도로→마산→2번국도→진전삼거리→14번 국도→고성→통영

[대중교통]
● 직행버스
* 서울-통영, 강남터미널에서 1일 10회, 남부터미널에서 1일 7회 운행
* 부산-통영,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직행버스 10분 간격
* 순천-진주, 50분 간격 운행
* 진주-통영, 15분 간격 운행

● 선박
부산 여객선터미널에서 거제 장승포/옥포/고현 행 고속페리 이용, 장승포/옥포/ 고현에서 통영행 직행버스(15분 간격 운행)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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