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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원종공신 염언상 묘 -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순국한 선무원종공신 염언상의 묘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남 통영시 정량동 162-19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염언상(廉彦祥)의 묘이다.

공신(功臣)이란 국가나 왕실을 위하여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던 칭호이다.
선무공신(宣武功臣)은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운 무신(武臣)들에게 준 훈호(勳號)로 1등, 2등, 3등의 3등급이 있었는데 1등은 이순신, 권율,원균의 3인이고 2등은 이억기 등 5인이며 3등은 이운룡 등 10인으로 총 18인이다.

원종공신(原從功臣)은 정공신(正功臣) 외에 작은 공을 세운 수종자(隨從者)에게 내린 칭호이다.
그러므로 선무원종공신이라하면 임진왜란 때에 무공을 세운 정공신 이외의 공신으로 선조 38년(1605) 4월에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발급한[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에 올려져 있는 9,060인을 말한다. 염언상은 명종 7년(1552) 통덕랑(通德郞:정5품의 문관) 염백련(廉白連)의 아들로 전라도 보성(寶城)에서 출생하였다.

천품이 영매하고 활달하여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았고 의기가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즐겨 병서(兵書)를 탐독하더니,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6품에 이르렀으나 직책이 뜻에 맞지 않아 물러나 순천(順天)에서 자연을 벗삼고 조용히 살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항상 이르기를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서 세울 준칙(準則)이 둘이 있으니 이는 충(忠)과 효(孝)이다" 라고 하였다.
이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과 동래가 잇따라 함락되고 장차 화가 호남에 미치려 하자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치려할 때 전라좌수사로 있던 이충무공의 격서(檄書)를 받고 그의 휘하로 달려가 유격장(遊擊將)이 되었다.

이충무공의 참모로 옥포와 한산해전에서 공을 세워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종4품)을 제수받았다.
1597년 2월 이충무공이 탄핵을 받아 서울로 잡혀갈 때, 염언상은 혼자서라도 압송함거를 호위코저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안홍국(安弘國)의 만류도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때 권율(權慄) 도원수가 초계(草溪)에 진을 치고 영호남을 방어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차남 탁(倬)을 비롯한 의병 수백명을 이끌고 남원(南原)에서 권원수를 찾아 뵙고 작전의 일익을 맡아 하동(河東)땅 악양(岳陽)에서 왜적을 크게 쳐부수었다.
또 곽재우(郭再祐) 의병장과 함께 의령(宜寧)과 함안(咸安)의 왜적을 차단하니 바닷가의 적들이 감히 호남땅을 넘보지 못하였다.
그후 방어사(防禦使) 이옥(李沃)을 도와 추풍령을 지키며 많은 공을 세웠는데 1597년 9월 23일 추풍령전투에서 46세를 일기로 장렬히 순국하였다.

전란이 끝난 후 염언상은 선무원종2등훈(宣武原從二等勳)에 추서되고 통훈대부군자감정(通訓大夫軍資監正:정3품 당하관)에 추증되었으며 철종 12년(1861)에 통정대부병조참의(通政大夫兵曹參議:정3품 당상관)에 추증되었다.
염장군의 묘는 원분(圓墳)으로 가족묘와 함께 묘역(851m2)을 이루고 있는데 묘의 위층(位層)이 가계순서(家系順序)가 아닌 사망순서에 따라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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