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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척화비(大院君斥和碑) - 쇄국정책의 상징 대원군 척화비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조선 고종 때 대원군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승리를 거둔 여세를 몰아 외세를 배격하는 쇄국주의 정치이념으로 추진하면서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게 된다. 고종 8년(1871)에 세운 남해 척화비는 화강석에 큰 글자로 주문 12자를, 측면에는 작은 글자로 주문 이외의 글을 새긴 것이다. 서울 외에도 경기도 강화, 부산 동래, 경남 함양, 경북 상주 등지에서도 똑 같은 내용의 비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남해 척화비는 내용은 같지만 비의 크기나 규모가 모두 본래의 척화비보다 훨씬 크다. 그리고 거북등에 얹혀있고, 가첨석(지붕 모양의 지붕)이 있다는 점이 또다른 특징이다.

*작은 역사 : 제너럴셔면호와 대원군의 쇄국주의
중국에 체류중이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 근대사에 역사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1886년 7월 이 상선이 중국 천진을 떠나 조선으로 왔다.선주 프레스톤,덴마크인 선장 페이지 등 승선자는 24명이었지만 무역선에 어울리지 않게 중무장하고 있었다.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7월 11일 평양 경내에 들어섰다.프레스톤 일행은 통상을 요구하는 한편 내륙진입을 저지하는 조선관리들을 감금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군중이 강변에서 항의하자 총과 대포를 쏘기까지 했다. 조선측도 포격으로 맞대응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당시 평양 관찰사 박규수가 고심 끝에 생각해낸 전술이 화공. 그는 땔감 운반선 3-4척을 연결, 인화물을 가득 실어 불을 붙여 떠내려 보냈다.셔먼호의 선원은 모두 불에 타 죽었고 선교사 토머스와 중국인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성난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
조선의 문을 두드린 셔먼호 사건 이후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이양선과 충돌이 있었다.이른바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어쩌다 승리를 거둔 셔먼호 사건으로 크게 고무되어 전투를 마다하지 않았다.화력에서 비교도 안되게 열세였던 조선군은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덕분에 결과적으로 두번 다 승리한 셈이 되었고 이것이 쇄국주의자 대원군을 고무시켜 나라를 우물 속 개구리처럼 움추려 들게 하고 근대화를 거부하는 결과를 낳았다. 셔먼호를 불태운 당사자 박규수는 훗날 개화파가 되었던 것과는 달리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까지 세워가며 자손만대에 서양 오랑캐와 화친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대원군은 세계정세에 무지했다.제국주의적 침략의 성격과 실상,이양선 배후에 있는 선진각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그 뒤, 조선은 열강의 식민지 각축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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