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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성 - 단군( 檀君 )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았다고

by 넥스루비 2007. 8. 7.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1~3리 산41

고려사< 高麗史 >의 지리지에 의하면 전등산< 傳燈山 >을 삼랑성< 三郞城 >이라고 부르며, 단군< 檀君 >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았다고 전해 온다고 하였다. 산의 이름은 길상산< 吉祥山 >이라고 하며 성의 이름은 정족산성< 鼎足山城 >으로 기록되기도 하였으나, 항상 이 지역에서는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는 구전< 口傳 >이 이어져 왔다. 성곽의 축조는 거친 할석< 割石 >으로 되어 있으며, 성의 안쪽 벽면도 할석으로 채워 안팎을 겹축< 겹築 >한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할석 사이마다 할석 부스러기로 쐐기 돌을 많이 사용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석축 이전에는 토축된 것이었다고 여겨지며, 해발 222.3m인 산의 정상에서 동향한 계곡을 포용하고, 동남향한 계곡에 수구과 남문이 있다. 북문은 북벽의 서쪽에 치우쳐 산봉우리 사이의 안부< 鞍部 >에 있고, 서문도 서남쪽 안부에 있으며, 동문은 남문의 북쪽으로 해발 107.2m의 봉우리 북쪽 안부에 있다. 성벽이 회절< 回折 >하는 곳마다 10여개의 곡성을 이루며, 치성< 雉城 >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성벽은 서측의 산정에서 북벽을 이루는 두 개의 봉우리와 동쪽 봉우리 및 서문 남동쪽의 봉우리 등이 있어서 마치 솥과 같은 고로봉형< 고로峰形 >을 이루었다. 조선왕조의 말기까지 존속하여 여장< 女墻 >과 총안< 銃眼 >·사혈< 射穴 >이 남은 곳도 있다. 1259년 (고려< 高麗 > 고종< 高宗 >46) 5월에 중랑장< 中郞將 > 백승현< 白勝賢 >의 풍수설에 따라 이 성내에다 가궐< 假闕 >을 지었다. 1606년(선조< 宣祖 >39) 마니산< 摩尼山 >에 사고< 史庫 >를 설치하여 실록< 實錄 >을 보존해 오다가 1660년(현종< 顯宗 >1) 삼랑성내의 정족산사고< 鼎足山史庫 >로 옮겼다. 이때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 璿源譜閣 >이 같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모두 없어지고 전등사< 傳燈寺 >만 남아 있다. 이 산성은 고려< 高麗 >때에 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739년(영조< 英祖 >15) 중수를 하면서,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 宗海樓 >라 하였고, 1764년 다시 성을 중수하였다. 성안에는 훈련도감과 금위영·어영청 소속의 창고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 산성은 1866(고종< 高宗 >3)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하려던 160명의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첩지로 유명하다. 현재 성내에는 당시 프랑스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순무천총< 巡撫千摠 > 양헌수< 梁憲洙 >의 승전비가 있고, 1976년 남문을 다시 복원하고 문루를 세워서 예전대로 종해루라는 현판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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