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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고구려비 - 국보 205호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

by 넥스루비 2007. 9. 12.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280-11

중원고구려비는 국보 제205호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있다. 중원 고구려비의 발견은 신라 진흥왕이 북진을 하면서 곳곳에 순수비를 세웠듯이 국원(國原, 지금의 충주) 땅을 빼앗은 고구려도 반드시 순수비를 세웠을 터이니 국원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가금면 일원을 찾기 1년여, 1979년 2월 24일 드디어 가금면 용전리 입석(立石) 마을 입구에서 고구려비를 발견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풍화로 비문이 심하게 마멸되어 분명하게 확인할 수는 없으나 장수왕 때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의 여러성을공략하고 개척한후에 세운 기념비이다. 5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판독된 비문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고구려, 신라, 백제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금석문이다.

발견 당시의 상태는 전면(前面)에 바위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 육안으로는 물론 탁본하여도 판독이 어려울 정도였다. 결국 이끼를 제거하고 조사한 결과 석비(石碑)의 형태는 석주형(石柱形)으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각자면(刻字面)을 갈고 비문을 새겼고 석질은 견고한 화강암으로 글자의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가장 넓은 면인 전면(前面)에 글씨가 가장 많이 남아 있었다.

각면은 높이가 전면(前面) 203㎝(碑面 높이 144m), 후면(後面) 188㎝(126), 좌측면 197㎝(141), 우측면 178㎝(136)인데 모두 다듬어졌으며 글자가 새겨진 부분과 행간(行間)으로 생각되는 부문에 차이가 있어 모든 면에 글자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 글자의 크기는 3~5㎝ 정도이며 1행(行)은 23자로 되어 있는데 전면은 10행 230자, 좌측면

은 7행 155자가 확인되었으며 우측면에도 6행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2000년 2월 26일 중원 고구려비 신석문 위원회(37명)에서 우측면에서 '前部大兄'이라는 고구려장관급 벼슬을 읽어내므로 측면에 모두 글자를 새겼으며 세밀한 판독결과 후면에서도 글자의 흔적이 뚜렷한데 의견을 모아 '巡'자와 비슷한 글자를 읽어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비석의 네 면에 모두 글자를 새겼다는 이야기가 된다.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서두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문자가 보이고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제위(諸位), 하부(下部), 사자(使者), 대형(大兄)' 등은 모두 고구려 관등명들이며, 비문 중의 '고모루성(高牟蔞城)'은 광개토대왕비에 보이는 성이므로 고구려의 비임이 분명하다. 석비 자체의 형태도 광개토왕비와 흡사하며 두툼하고 무게도 있어 보인다. 그리고 발견된 곳이 중원지역이란 점은 건립시기를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한 5세기 전후로 좁혀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비문의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어렵고 그래서 전면(前面)에 대한 판독도 이견(異見)이 많다. 그래서 「중원 고구려비」가 3면비인가, 아니면 4면비인가, 비의 시작면이 어디인가, 비의 건립 연대, 비문의 내용도 서로 다르게 파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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