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강서당 -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김동진(金東鎭)이 후진의 양성을 위해 건립한 서당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북 영주시 부석면 상석1∼2리 364-7

이 건물이 위치한 상석리< 上石里 >는 산간 마을이지만 비교적 큰 규모의 자연 부락으로서 40여호에 달하며, 선성< 宣城 >(예안< 禮安 >) 김씨< 金氏 > 20여호를 위시하여 여러 성씨< 姓氏 >가 혼거하고 있다. 이 건물은 구한말의 독립운동가이며, 이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김동진< 金東鎭 >(1867-1952)이 후진< 後進 >의 양성을 위해 건립한 서당이다. 김동진은 본관은 선성< 宣城 >(예안< 禮安 >), 자는 국경< 國卿 >, 호는 정산< 貞山 >으로 이조판서< 吏曹判書 > 김담< 金淡 >(1416-1464)의 16세손< 世孫 >이며, 흥해군수< 興海郡守 > 김선< 金선 >(1596-1660)의 10세손이다. 그는 이상정< 李象靖 >(1710-1781, 대산< 大山 >), 김흥락< 金興洛 >(1827-1899, 서산< 西山 >) 계통의 학문을 계승한 구한말 영남 지역의 대표적 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1908년이래 소수서원< 紹修書院 >의 원장< 院長 >을 3번 역임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日帝强占期 >에는 독립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여 1913년 독립의군부< 獨立義軍府 >의 설립에 가담하였고, 1919년 파리장서사건에도 주동< 主動 > 인물< 人物 >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서명< 書名 > 순위< 順位 > 4번< 番 >). 이로 인해 체포 구금되었고, 이후 이 지역에서 일어난 여러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몇 차례에 걸쳐 투옥되었으며, 일제< 日帝 >에 항거하기 위해 끝까지 두발< 頭髮 >에 있어 상투의 유지, 한복< 韓服 >의 착용 등을 고집하여 일제로부터 ‘유생< 儒生 > ’·‘양반< 兩班 > ’·‘한학자< 漢學者 > ’·‘무직< 無職 > ’등으로 지목< 指目 >되어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이 지역의 유림으로 활약하면서 이곳 도강< 道岡 >서당을 중심으로 후진의 양성에 노력하여 평소 80여명의 학생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사후에 차자< 次子 > 김와< 金渦 >(1906-미확인?, 자 군설< 君卨 >)가 이를 계승하여 계속 서당을 운영하여 1960대까지 서당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이 건물에는『매학당실록< 梅鶴堂實錄 >』1책,『매학당팔경화첩< 梅鶴堂八景畵帖 >』1책,『매학당팔경제영< 梅鶴堂八景題詠 >』1책,『정산선생문집< 貞山先生文集 >』13권 7책(1950년대 간행)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 건물은 상량문< 上樑文 >이 없어 구체적인 건립 연대를 알 수 없고, 현재의 상태는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퇴락한 부분이 많아서 보수가 시급한 형편에 처해 있다. 이 건물은 건립 연대가 오래지 않은 서당< 書堂 >으로서 건축적인 면에서는 자료적으로 주목될 수는 없지만, 건립자인 김동진< 金東鎭 >의 독립 운동에의 참여 및 경상도 북부 지역 유림< 儒林 >의 산실< 産室 >이었던 점을 감안하여 '문화재자료'또는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존할 필요성이 있다.

댓글

최신글 전체

이미지
제목
글쓴이
등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