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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인정 - 초곡리( 草谷理 )의 인동장씨( 仁同張氏 ) 집성촌에 위치하고 있는 칠인정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초곡리 825외

칠인정< 七印亭 >은 흥해읍< 興海邑 > 소재지< 所在地 >에서 서쪽으로 약 4㎞ 가량 떨어진 초곡리< 草谷理 >의 인동장씨< 仁同張氏 > 집성촌에 위치하고 있다. 정자< 亭子 >의 전면< 前面 >에는 쌍괴수< 雙槐樹 >에서 흐르는 세청수< 細淸水 >를 담았다 하여 오래전부터 이 마을 약수터로 유래되고 있는 방지< 方池 >가 하나 있고, 정자는 못 뒤의 다소 높은 대지< 垈地 >에 정남향< 正南向 >하여 자리잡고 있다. 정자< 亭子 >의 사위< 四圍 >에는 한식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정자 앞에는 쌍괴수< 雙槐樹 >라 부르는 거목< 巨木 >이 자리잡아 정자< 亭子 >의 운치< 韻致 >를 한층 더하여 주고 있다. 정자< 亭子 >는 이층< 二層 > 누정< 樓亭 >의 형태< 形態 >인데, 상층< 上層 >에는 전면< 前面 > 3간< 間 >을 같은 크기로 간살을 잡아 어간< 御間 >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좌< 左 > ·우< 右 >에는 온돌방< 溫突房 >을 둔 중당협실형< 中堂挾室形 >의 평면형< 平面形 >을 취하고 있다. 대청< 大廳 >과 좌측방< 左側房 >의 전면< 前面 >에는 측면< 側面 1간< 間 > 규모< 規模 >의 비교적 넓은 퇴간< 退間 >을 두었으나 우측간< 右側間 >은 측면< 側面 >을 1간< 間 > 반< 半 > 규모< 規模 >로 간살을 잡은 관계로 전면< 全面 >에는 반< 半 > 간< 間 > 규모< 規模 >의 퇴간< 退間 >이 형성< 形成 >되었으며, 전면< 前面 >과 좌< 左 > ·우측< 右側 >에는 난간< 欄干 >을 두르고 계자각< 鷄子脚 >을 설치< 設置 >하였다. 하층< 下層 >에는 양쪽 온돌방< 溫突房 > 하부< 下部 >에만 함실을 설치< 設置 >하였고, 대청< 大廳 >의 하부< 下部 >는 개방< 開放 >되어 있다. 자연석으로 외벌대 쌓기한 기단< 基壇 >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은 일층주< 一層柱 >에는 모두 원주< 圓柱 >를, 이층주< 二層柱 >에는 우측방< 右側房 > 대청< 大廳 >쪽의 기둥 2본< 本 >만 제외< 除外 >하고는 모두 원주< 圓柱 >를 사용< 使用 >하였다. 우측방< 右側房 > 대청< 大廳 >쪽의 기둥은 전면< 前面 >에는 각주< 角柱 >에 모를 죽여 팔각주< 八角柱 >로 만들었고 뒤쪽 기둥에는 각주< 角柱 >를 세웠다. 주상< 柱上 >에는 이익공< 二翼工 >으로 장식< 粧飾 >하였는데, 전면< 前面 >과 좌측방< 左側房 > 내진주< 內陣柱 > 상부< 上部 >의 익공< 翼工 >은 우설< 牛舌 >의 단부가 말려 올라간 형상이며, 측면< 側面 >과 배면< 背面 >의 익공< 翼工 >은 앞으로 뻗은 형상이다. 가구< 架構 >는 5량가< 樑架 >인데 대량< 大樑 >위에는 대접받침을 놓고 장방형< 長方形 >의 판재< 板材 >를 세워 종량< 宗樑 >을 받게 하였으며, 종량< 宗樑 >위에는 가장자리에만 초각< 草刻 >을 한 파연< 波蓮 >대공을 세워 장설< 長舌 >와 마룻대를 받게 하였다. 문비< 門扉 >는 온돌방의 전면< 前面 >에는 양개 세살문을, 측면< 側面 >에는 외짝 세살문을 설치< 設置 >하였다. 좌측방< 左側房 >과 대청< 大廳 >사이에는 외짝 들어열개문과 외여닫이문을 설치< 設置 >하였고 우측방< 右側房 >과 대청< 大廳 >사이에는 2분합문< 分閤門 >과 외짝 들어열개문을 설치< 設置 >하였다. 문틀은 온연귀하였으며 머름은 다소 높이 설치< 設置 >되었다. 이 건물은 산간 지역에 위치해 있는 남향< 南向 >의 정자로서, 2개의 방과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1409년(태종 9) 고려말 흥의위< 興義衛 > 보승랑장< 保勝郞將 > 출신의 장표< 張彪 >가 이 정자를 건립하여 낙성식을 거행할 때 그의 아들 4인과 사위 3명이 모두 관인< 官人 >으로 재직하면서 이에 참여하여, 정자의 앞에 있는 두 그루의 괴목< 槐木 >에 인수< 印綬 >를 걸었다는 것을 기념하여 칠인정< 七印亭 >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조선 왕조 후기인 18세기 후반에 중창된 정자로서, 산간지역으로 이주해 갔던 재지사족< 在地士族 >들의 삶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1986년에 중수하였지만 원형의 변형은 없고, 정자에 부속되어 있었던 요사< 寮舍 >는 철거되었으며, 93년에 지방비의 지원으로 기와 ·담 ·장벽 등의 중수작업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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