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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건릉 - 장조와 헌경황후를 모신 융릉과 정조와 효의황후를 모신 건릉

by 넥스루비 2007. 8. 7.
경기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 산1-1

융건릉은 조선 제22대 정조(正祖, 재위1752-1800)의 아버지 장조(莊祖)와 헌경황후(獻敬皇后)를 모신 융릉과 정조와 효의황후(孝懿皇后)를 모신 건릉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융릉은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의 둘째 아들이며 정조의 생부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추존 莊祖)와 그의 비 혜경궁홍씨(惠慶宮 洪氏, 추존 효의황후)의 합장능이다.

융릉은 능으로 들어가 오른쪽에 있는 재실을 지나 숲속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택해 들어가야 한다. 묘내수(墓內水)를 건너는 금천교가 나오고 이 판교를 건너면 융릉 안내문을 옆에 둔 홍살문이 보이면서 멀리 정자각과 능의 일부분이 보인다.
홍살문을 넘어서면 참도(參道)가 두 사람이 함께 걸을 수 있도록 깔려 있고 그 아랫단 왼편에도 정자각까지 넓게 박석을 깔아 놓았다. 참도곁에는 수복방(守僕房, 재기를 보관하거나 능을 지키는 관리가 있던 방)의 자리인 듯, 아직 복원이 안된 채 남아있다.

정조는 현륭원을 조상하면서 이렇듯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
능앞의 다른쪽 무인석은 코가 깨어져 보기 흉하나 문인석은 둘 다 사각의 복투가 아니라 금관을 쓰고 있다. 그리고 이 상들의 크기는 장대하지 않으나 종래의 가슴에 파묻었던 목이 위로 나와 답답하지 않고 조상들도 사실적이다.

건릉은 조선 제22대 정조와 효의황후(孝懿皇后)의 합장릉이다.
건릉은 숲속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야한다. 융릉의 반대 방향이다. 융릉이 있즌 언덕의 오른쪽 즉 서쪽 언덕이고 융릉과의 사이에 두 언덕을 사이에 두고 있어 건릉으로 가는 길은 언덕 아래로 돌아서 가는 모양으로 하고 있다. 걷는 사람은 나무숲이 언덕으로 가리므로 분명하게 인식할 수 없다.

건릉 역시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참도(參道)가 특이하다. 1단이 높은 참도만이 아니라 좌우 양쪽에 정자각까지 넓게 박석으로 깔아 놓았다. 건릉은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그 밖의 모든 상설은 융릉의 예를 따랐다. 그래서 합장릉인데도 상석을 하나만 놓았고 장명등도 융릉의 것처럼 화문(花文)이 새겨져 화려하다. 방향표시를 위해 난간석주에 문자로 십이지를 표시한 것이 보인다.

문, 무인석은 등신대에 가까우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고 특히 입가에 미소를 띤 모습이라 여유로와 보인다. 문인은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입고 있다. 이밖에 3면의 곡장(曲墻)과 상석, 석마 2쌍, 망주석 1쌍, 수라청, 망료위, 표석, 재실이 배치되어 있다.

정조는 1800년 6월 28일 보령 49세로 승하하였다. 처음에는 그의 유언대로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으나, 이후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주장이 있어 길지를 물색하던 중 정조의 비 김씨가 승하하자 순조 21년(1821) 현 위치에 이장하여 효의 황후와 합장하였다.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대한 제국이 성립되자 황제로 추론되어 선황제(宣皇帝)가 되었다.

효의황후(孝懿皇后, 1753-1821)는 좌참찬에서 영의정으로 증직된 김시묵(金時默)의 딸이다. 1762년(영조 38) 세손빈으로 책봉되어 영조와 가례를 올린 효의황후는 효성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성으로 모시니 궁중에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또한 우애가 지극하였다. 성품이 개결(介潔)하고 사정에 흐르지 않아서 사가(私家)에 내리는 은택(恩澤)을 매우 경계하여 궁중에서 쓰고 남은 재물이 있어도 궁화(宮貨)는 공물이라 하여 사사로이 시가에 물화를 내리는 적이 없다고 한다.
일생을 검소하게 보낸 효의 왕후에게 생전에 여러차례 존호(尊號)가 올려졌으나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승용차]
* 1번 국도 이용(서울 - 수원 46Km 40분소요)
* 1번 국도 이용(수원 - 병점 10Km 15분 소요)
* 288번 국도 이용(병점 - 융건릉 5Km 10분 소요)



[대중교통]
* 수원역에서 24번, 46번 시내버스를 타고 융건릉에서하차(소요시간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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