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희궁 - 고즈넉한 시민의 쉼터

by 넥스루비 2007. 8. 7.
서울 중구 정동 3

경희궁은 광해군 9년인 1617년에 창건된 이후, 8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부지 7만 2천 8백평에 정전, 동궁, 침전, 별당을 비롯해서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만큼 큰 궁궐이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다.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곳이 바로 경희궁이긴 하지만 그나마 초석과 기단이 남아 있고,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잘 보전돼 있어 궁궐의 자취를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경희궁의 전신은 경덕궁(敬德宮)이었다. 경덕궁은 본래 인조의 생부 원종(元宗)의 사저(私邸)가 있던 곳으로 이 곳에 왕기(王氣)가 서린다는 말을 듣고 광해군이 왕기를 없앤다는 뜻으로 왕 9년(1617) 6월에 궁전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인경궁과 함께 공사가 진행된 관계로 재력의 소모가 막대하여 공사가 뜻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광해군은 궁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왕 15년 3월 계해반정(癸亥反正)으로 폐위되고 말았는데, 그 뒤 경덕궁(慶德宮)은 인조가 인목대비를 받들어 일시 이 곳에 이거한 일이 있었고 그 후에는 역대 왕들이 수시로 이 궁에 거처한 일이 있었으므로 경덕궁은 왕궁의 하나로 손꼽힐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영조 36년(1760)에 경덕의 궁명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동음(同音)이라 하여 이를 피하여 경희궁(慶熙宮)으로 고쳤다. 순조 29년(1829) 10월 경희궁은 화재로 인하여 건물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순조 31년(1831)에 다시 중건되었고, 철종 10년(1859)부터 11년 사이에 보수 공사가 시행되었다. 근세에 이르러 일제가 침략해 와서 한일합방이 체결될 무렵 경희궁은 숭정전(崇政殿) · 회상전(會祥殿) · 흥정당(興政堂) · 흥화문(興化門) · 황학정(黃鶴亭)만이 남아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들어온 뒤로 숭정전(崇政殿)은 1926년 남산 산록에 이치(移置)되어 조계사(曹谿寺)의 본당으로 사용되었고, 흥정당(興政堂)은 1928년 광운사(光雲寺)로 이건하였으며, 황학정(黃鶴亭)은 1923년 사직단 뒤로 옮겨졌다. 흥화문(興化門)은 1932년 박문사(博文寺)의 북문으로 이치되어 최근까지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경희궁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경희궁 자리에는 1910년 일본인 자제를 교육하는 경성중학교(옛 서울중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대중교통]
* 지하철
5호선 서대문(4)-도보 10분
* 버스
경희궁 720(좌석)


댓글

최신글 전체

이미지
제목
글쓴이
등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