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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 태종이 머물던 별궁

by 넥스루비 2007. 8. 7.
서울 종로구 와룡동 2-1

창경궁은 원래 별궁(別宮)으로 지어졌으며 창덕궁과는 담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다. 도성내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창덕궁과 함께 동궐이라고도 불린다. 궁이 있는 자리는 고려시대 남경(南京) 수강궁(壽康宮)터로 전한다.
세종 즉위년, 1418년에 상왕(上王)이 된 태종이 머무는 집으로 건물을 지어 수강궁이라 불렀다.

1484년(성종 15) 창경궁이 수강궁 자리에 창건 되는데 당초에는 왕의 조모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세조의 비)와 모후(母后)인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덕종의 비), 예종의 계비(繼妃)인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韓氏)를 모시기 위해 수리하고 확장함으로써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으며 1616년(광해군 8)에 재건이 이루어 졌다.
이 궁은 잦은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는 일이 계속되었는데 그 중 큰 화재는 인조와 순조때의 대화재였다. 이러한 크고 작은 화재로 말미암아 당초의 궁궐 모습에 변화가 이루어 졌다.

이와함께 숙종때 계비 민씨(閔氏)와 장희빈(張禧嬪)의 갈등으로 빚어진 신사년(辛巳年)의 변고가 일어났는가 하면 영조때는 왕이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한 신임년(辛壬年) 사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고종 연간까지 궁은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 당시 간행된 「궁궐지」에 의하면 모두 2,379칸에 달하는 여러 전각들이 있었다고 한다.

융희 원년(1907) 11월에 순종황제가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로도 이 창경궁은 자주 황제가 산책 소요하며 빈객을 접견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그러다 일제가 강점한 후 창경궁 경내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창덕궁에 우울하게 기거하는 순종황제를 위한다는 명분이었다.

이 와중에 창경궁은 크게 손상을 입어 행각과 궁문, 궁장들이 훼손되고 심지어는 궁궐의 초석까지 파내어 홍화문 안 어구의 제방으로 사용하는 등 세인의 탄식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해방후에도 수십년간 무심한 채 놀이터로 이용해 오다가 1984년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궁의 복원사업을 착수하게 된다.

창경궁이 위치한 곳은 서쪽으로는 창덕궁과 붙어 있고 남쪽으로는 종묘(宗廟)와 통하는 곳으로 주변은 낮은 언덕들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궁은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은 경복궁, 창덕궁이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 이 궁이 별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지며, 지형상으로도 동향이 적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내전은 대부분 남향하였다.
궁은 정전과 편전(便殿)이 있는 외전(外殿)과 그 뒤 북서 방향에 펼쳐진 내전이 중심을 이루며, 외전의 중심 건물인 정문, 중문, 정전은 일직선상에 놓여 있고 주변에 행각이 네모 반듯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이 부분은 경복궁과 유사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대중교통]
* 지하철
4호선 혜화(4)-도보 15분
* 버스
창경궁 16, 2, 20, 205, 205-1, 34-1, 5-1, 710, 8, 8-1, 84,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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