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덕궁-대조전 - 용마루가 없는 전각...왕과 왕비의 침전

by 넥스루비 2007. 8. 7.
서울 종로구 와룡동 1

왕과 왕비의 침전이며 왕과 가족들이 생활하던 중궁전이다. 이 건물은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데 이는 용으로 비유되는 왕이 상주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옮겨지었다. 검약하여 안존하여야 한다는 신조에 따라 왕비의 침소도 화려하지 않았다.

임금의 처소를 정침(政寢)이라 하고 정궁(政宮)이라 한다. 왕비의 침전은 중궁(中宮)이다. 내전에는 정궁, 중궁 외에 태자 처소인 동궁(童宮), 어머니와 할머님 이 머무는 서궁(西宮), 그리고 작은 마나님들이 사는 빈궁(嬪宮)의 여섯 궁이 있다.
이 여섯궁이 있어야 궁궐의 궁이 된다는 말이다.

대조전은 궁중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은 왕비의 치밀 처소인 침전이다.
용마루가 없는 이 전각에서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仁組, 16대, 재위 1623-1649), 효종(孝宗, 17대, 1649-1659)이 생을 마쳤고 순조(純組, 23대, 재위 1800-1834)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 된 익종(翼宗, 1809-1830, 효명세자로 22세의 나이에 대리청정 4년만에 요절한다)이 태어나기도 한 곳이다.

대조전은 왕비의 처소다운 아늑한 정취가 감돌고 단아한 단청과 화강암 월대의 은은한 빛이 푸른잔디와 어울려 말쑥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깔끔해 보이는 네모기둥과 창살의 무늬 그리고 잘 정돈된 앞마당의 잔디 등 대조전을 에워싸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에서 어딘지 모르게 일본냄새가 풍긴다. 알고 보면 이 냄새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1917년 대조전 한 궁녀의 단순한 실화로 내전 일곽이 불타게 되고 순종은 연경당을 임시 거처로 삼고 있을 동안 낙선재를 수리하여 다시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대조전의 복구공사는 일본인들에 의해 주도 되었는데 전각의 양식과 구조는 전통에 따라 이전과 동일하게 하되 내부의 장식과 설비, 채광, 통풍, 배수의 방법은 최신의 기술을 취하되 고아한 조선 특유의 건축미를 현대적 기술로 발휘한다는 것이었다. 소실된 1천평의 건물을 만 2년의 기간에 준공한다는 계획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 그 부재를 대조전 복구에 썼다. 이때 헐린 경복궁의 전각들은 교태전, 강녕전, 동행각, 서행각, 연길당, 연생전, 인지당, 흠경각, 함원전, 만경전, 홍복전 등이있다.

대조전 월대 양쪽에도 무쇠로 만든 '드무'가 놓여 있다. 물을 담아 두어 상징적인 방화수로 삼고 있다. 안쪽의 두 개는 입언저리가 벌어져 있고 바깥쪽의 것은 안으로 오무라 들어 있다. 또 근정전과는 달리 손잡이가 달려있다. 일설에는 해마다 동지를 맞아 대조전에서 팥죽을 쑬 때 이 쇠항아리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동짓날 팥죽 또한 그 붉은 색으로 인해 벽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을 보면 이 항아리들이 지니는 의미는 크다고 할수 있다.

[대중교통]
* 지하철
3호선 안국(3)-도보 4분
* 버스
창덕궁 143-1, 16, 2, 6, 8, 8-1


댓글

최신글 전체

이미지
제목
글쓴이
등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