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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백의총 - 칠백의총 (七百義塚)

by 넥스루비 2007. 8. 7.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52-1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선생< 趙憲先生 >과 영규대사< 靈圭大師 >는 의병< 義兵 >을 일으켜 1592년 8월 1일 청주성< 淸州城 >을 탈환하고 1592년 8월 금산< 錦山 >의 왜적< 倭敵 >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전하였다. 이때 금산성< 錦山城 >에는 소조천륭경< 小早川隆景 >과 안국사< 安國寺 > 혜경< 惠瓊 > 입화통호< 立花統虎 >가 거느린 정예한 왜적< 倭敵 >이 호남으로 진출하려다가 7월 7일 웅치< 熊峙 >에서 김제군수< 金堤郡守 > 정담< 鄭湛 >의 군< 軍 >과 혈전< 血戰 >을 감행하였고 7월 8일에는 이치< 梨峙 >에서 권율장군< 權慄將軍 >의 군< 軍 >과 싸워 패< 敗 >하였으며 7월 9일 금산< 錦山 > 눈벌에서 초토사< 招討使 > 고경명< 高敬命 >과 방어사< 防禦使 > 곽영< 郭嶸 >의 7천군< 7千軍 >과 싸웠는데 고경명선생< 高敬命先生 >의 의병부대< 義兵部隊 >는 죽음으로 혈전< 血戰 >을 감행하여 왜적< 倭敵 >의 손실이 자못 컸다. 이런 사항 속에서 조헌선생< 趙憲先生 >은 권율장군< 權慄將軍 >의 관군< 官軍 >과 8월 17일 금산< 錦山 >의 적< 敵 >을 치기로 통첩을 보내고 금산< 錦山 >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막하의 별장< 別將 >과 승장< 僧將 > 영규< 靈圭 > 등< 等 >은 전기< 戰期 >의 부적합함과 오합지중의 의병< 義兵 >만으로 강력한 왜적< 倭敵 >과 싸우는 것은 필패< 必敗 >라고 막기도 하였으나 조헌선생< 趙憲先生 >은 내가 스스로 정하여 통보한 전기< 戰期 >에 대하여 신의< 信義 >를 저버릴 수 없다 하였으며 국란< 國亂 >을 당하여 적< 敵 >을 앞에 두고 기회를 기다릴 수 없다 하여 임전의 결의를 굳게 함에 모두 이에 따르게 되었다. 영규대사< 靈圭大師 >도 승군< 僧軍 > 부장< 部將 >들이 금산전< 錦山戰 >에 임하는 것을 꺼려 하였으나 이미 주장< 主將 >이 결심한 바라 국난에 의병< 義兵 >을 일으켜 생사< 生死 >를 같이한 동지로서 그들만 전지< 戰地 >에 보내고 우리가 보신< 保身 >할 수 없다고 필사< 必死 >의 싸움에 나아갈 것을 결의하는 것이다. 임진국란< 壬辰國亂 >의 여러 전투< 戰鬪 >에서 볼 수 없는 신의< 信義 >와 충절< 忠節 >과 의리< 義理 >가 뭉쳐 하나가 되는 자못 뜨거운 감격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8월 18일 아침 조헌선생< 趙憲先生 >은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의< 義 >의 일자< 一字 >에 부끄럼이 없게 하라' 하여 필사무퇴< 必死無退 >의 결의< 決意 >로 금산 연곤평 들에서 싸우게 되었다. 초전< 初戰 >에도 세번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무기가 다하고 드디어는 백병전< 白兵戰 >이 전개되어 사람과 말이 엉키어 베고 찌르는 장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에 조헌선생< 趙憲先生 >을 위시한 승장< 僧將 > 영규대사< 靈圭大師 >와 이광륜< 李光輪 > 임정식< 任廷式 > 김절< 金節 > 변계온< 邊繼溫 > 양응춘< 楊應春 > 곽자방< 郭自防 > 김희철< 金希哲 > 김환< 金환 > 강중서< 姜中恕 > 강인서< 姜仁恕 > 조헌선생< 趙憲先生 >의 아들 완기< 完基 > 등< 等 > 칠백의사< 七百義士 >가 모두 전사< 戰死 >하였다. 적< 敵 >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해 8월 22일 조헌선생< 趙憲先生 >의 제자인 박연양< 朴延亮 >와 전승업< 全承業 >이 시체를 거두어 한 무덤을 만들어 칠백의총< 七百義塚 >이라 하였다. 1603년에 중봉조선생< 重峰趙先生 > 일군< 一軍 > 순의비< 殉義碑 >가 서고 1634년 순의단< 殉義壇 >을 설치< 設置 >하여 제향을 올려 왔다. 1647년 종용사< 從容祠 >를 건립< 建立 >하고 조헌선생< 趙憲先生 >과 영규대사< 靈圭大師 > 및 금산< 錦山 > 눈벌에서 순국< 殉國 >한 고경명선생< 高敬命先生 >과 금산< 錦山 >에서 전사< 戰死 >한 변응정< 邊應井 > 등< 等 > 막하 제장과 사졸< 士卒 >에 이르기까지의 신위< 神位 >를 모셨다. 1940년 일본인< 日本人 >에 의하여 조선생일군순의비< 趙先生一軍殉義碑 >가 폭파당하였던 것을 금산 주민들이 비편< 碑片 >을 감추어 보존< 保存 >하였다. 그간에 종용사와 칠백의총< 七百義塚 >이 퇴락하고 황폐함에 박정희대통령< 朴正熙大統領 >의 지시로 여러차례 묘역< 墓域 >의 보수정화사업< 補修淨化事業 >이 있었다. 1963년에 묘역< 墓域 >을 넓히고 1968년부터 1969년까지 종용사< 從容祠 >를 다시 짓고 묘역< 墓域 >을 조경< 造景 >하였으며 1976년에 기념관< 紀念館 >, 칠백의사순의탑< 七百義士殉義塔 >, 관리사무소< 管理事務所 >, 한글 일군순의비 등을 새로 건립하였다. 그리고 주차장< 駐車場 >과 진입로< 進入路 >확장 등 전경역< 全境域 >의 조성사업< 造成事業 >이 이룩되었다.

[승용차]
● 경부고속도로→대진고속도로→금산IC→금산→칠백의총

[대중교통]
● 열차
* 서울-대전(오전 5시30분~오후 11시, 수시운행)
* 부산-대전(오전 5시5분~오후 11시, 수시운행)

● 고속버스
* 서울-금산, 강남고속버스터미널(오전 6시30분∼오후 6시30분, 1:30분 간격)
* 대전-금산, 동부고속버스터미널(오전 6시∼오후 10시, 수시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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