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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고문 - 나주시 남내, 성북, 금남, 향교동 일대에 돌로 쌓은 성을 나주읍성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남 나주시 남내동

나주시 남내, 성북, 금남, 향교동 일대에 돌로 쌓은 성을 나주읍성이라 한다. 나주읍성에는 동·서·남·북에 성문을 설치하고 성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현재의 성터 길이는 3,300m이며 조선초기 김계희 목사가 재임하고 있을때인 1457∼1459년 사이에 쌓은 것이다. 나주읍성의 흔적이 문헌에서 처음 확인된 것은 『고려사』卷103 列傳16 김경손(金慶孫) 전에서 확인된다. 김경손은 고종 24년(1237)에 전라도(全羅道) 지휘사(指揮使)가 되었다. 이때 초적(草賊) 이정년 형제가 원률·담양등 제군의 무뢰배들을 불러 모아 해양(海洋)등 주현(州縣)을 치며 내려오다가 경손이 나주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羅)州城을 포위하는데 적의 무리가 매우 많았다. 김경손이 성문(城門)을 올라 바라보고 말하기를 "적이 비록 많으나 짚신을 신은 촌백성일 뿐이다."하고 즉시 별초(別抄)가 될 만한 사람 30여명을 모아 경손이 물리치고 문을 열고 나가니 현문(懸門)이 아직 내려지지 않아 문지기를 불러 목을 베고 곧 현문을 내렸다. 여기에 나오는 주성(州城)이 나주읍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고 '성문(城門) 현문(懸門)'등은 나주읍성의 성문을 지칭하는 것일 것이다. 따라서 나주읍성은 늦어도 1237년 이전에는 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윗 기사의 내용 중에서 올리면 닫치고 내리면 열리는 개폐방식을 채택한 현문(懸門)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어, 그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한편 고려말기에 나주읍성에 문루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음은 정도전(鄭道傳)이 쓴 다음의 『登羅州東樓諭父書』삼봉집 卷3에 나타난다. "나 도전(道傳)이 언사(言事)로 재상에게 거슬려서 회진현(會津縣)으로 추방되어 왔는데 회진현은 나주의 속현이다. 회진현에 이르는 길이 나주를 거치게 되어 동누(東樓)에 올라 배회하며 바라보니 산천의 아름다움과 인물의 번성함이 남방의 일배 거진(巨鎭)이다...이고을은 바닷가의 지극히 먼 변방이어서 근심되는 것이 왜구이다. 연행의 다른 주군(州郡)들은 혹은 사로잡히고 혹은 이사를 해가서 소연히 사람이 없으므로 토지를 지키고 공부(貢賦)를 바치지 못한다. 그러나 나주는 그 중에 끼어 있으면서도 번성하기가 거의 평일과 같아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어 즐거움을 누린다." 삼봉 정도전은 고려말 우왕 원년(1375)재상에게 직언하다가 미움을 사서 회진으로 귀양살이를 한적이 있는데, 윗 글은 그때 회진현으로 내려가는 길에 잠시 나주성의 동루(東樓)에 올라 나주의 나이많은 어른들을 타이르며 쓴 글의 일부이다. 현재의 남고문은 93년 12월에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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