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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초의 - 고종( 高宗 )이 착용( 着用 )한 것이라고 하나...

by 넥스루비 2007. 8. 7.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11

이 학창의< 鶴창衣 >는 이화여자대학교< 梨花女子大學校 > 박물관< 博物館 >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고종< 高宗 >이 착용< 着用 >한 것이라고 하나 그 진부< 眞否 > 여부는 미심< 未審 >이다. 그러나 그 보존상태< 保存狀態 >는 양호하여 조선말< 朝鮮末 >의 학창의< 鶴창衣 >의 제도< 制度 >를 아는데는 대표적인 유의< 遺衣 >가 될 것이다. 원래 이 학창의< 鶴창衣 >는 조선중기< 朝鮮中期 > 문사< 文士 >의 편복< 便服 >으로 관복< 冠服 >을 착용< 着用 >할때 그 아래에 입는 것으로, 다시 안에 소창의< 小창衣 >를 받쳐입게 되어 있다. 다만 보통의 학창의< 鶴창衣 >는 바탕색이 백색< 白色 >인데 이 학창의는 남색< 藍色 >이라는 면< 面 >에서 연구< 硏究 >의 여지가 있다하겠다. 이 제도는 고려< 高麗 >중기에 송< 宋 >나라에서 전래< 傳來 >한 심의< 深衣 >의 제도와 유사한 것으로, 다만 이 학창의는 직접적으로는 조선초의 중단< 中單 >의 제도를 물려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그 제도는 학창의< 鶴창衣 >와 같으나 그 전래적인 학창의에서는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그러므로 이 유의< 遺衣 >는 학창이라기보다는 대창의< 大창衣 >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흑색< 黑色 > 명주< 明紬 >의 선을 달은 것은 대창의< 大창衣 >와 다른 점이다. 보통 영조< 英祖 >때부터 가례도감의궤< 嘉禮都監儀軌 >에 창의가 많이 나오고, 숙종< 肅宗 >대의 김덕원< 金德遠 >의 유의에도 창의가 많다. 창의는 세자락 옷이기 때문에, 이를 편복으로 밖에 입기에 거북하여 그 위에 이 대창의< 大창衣 >, 중치막< 中致莫 >을 덧걸친다. 이런 면에서 조선말에 오면 여러가지 포의< 袍衣 >가 중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옷도 그 여세를 몰아 문사복< 文士服 >으로서의 학창의가 아니라 대창의< 大창衣 >, 중치막< 中致莫 >으로서의 사대부< 士大夫 >의 중의< 中衣 >로 상용< 常用 >된 것 같다. 이 유의< 遺衣 >는 소매가 광수< 廣袖 >이므로 대창의< 大창衣 >에 해당하고, 옷고름이 99.3cm가 됨으로서 조선조말< 朝鮮朝末 >이라는 표신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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