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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풍암리동학혁명군전적지 - 조선(朝鮮) 말기(末期) 동학혁명군이 관군(官軍)과 싸웠던 전적지

by 넥스루비 2007. 8. 7.
강원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505-11

홍천 풍암리< 洪川 풍岩里 >에 위치한 동학혁명군전적지< 東學革命軍戰蹟地 >는 조선< 朝鮮 > 말기< 末期 > 동학혁명군이 관군< 官軍 >과 싸웠던 전적지이다.
동학혁명은 고종< 高宗 > 31년(1894) 교조신원운동< 敎祖伸寃運動 >의 실패와 전라도< 全羅道 > 고부군수< 古阜郡守 > 조병갑< 趙秉甲 >의 탐학< 貪虐 >이 원인이 되어 부당한 처사를 호소한 농민들의 요구가 묵살되자 분노한 동학접주< 東學接主 >인 전봉준< 全琫準 >이 중심이 되어 보국안민< 輔國安民 >의 기치< 旗幟 >를 내걸고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이때 홍천지방< 洪川地方 >에서도 농민항쟁< 農民抗爭 >이 크게 일어났는데 동학군의 일부가 홍천관아< 洪川官衙 >를 공격하고자 산에서 내려와 홍천읍 장야촌 지역까지 진군< 進軍 >했을 때, 당시 홍천지방의 관군총사령관< 官軍總司令官 > 맹영재< 孟英在 >와 접전< 接戰 >하여 속초리< 束草里 >에서 동학군 30여명이 전사< 戰死 >했다.
장야촌에서 패전한 동학농민군< 東學農民軍 >이 서석면< 瑞石面 > 풍암리< 豊岩里 >로 퇴각< 退却 > 집결하여 김숙현< 金肅鉉 >을 중심으로 수천 명의 동학군이 최후의 항전지인 이곳 자작고개에서 관군과 치열한 접전 끝에 패퇴하게 되어 동학혁명은 실패하고 말았다.
1976년 자작고개에서 새마을 사업을 하던 지역주민들이 유해더미를 발견했는데, 당시의 사상자가 약 8백여 명이 될 것이라 추정< 推定 >하지만 대부분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구덩이에 쓸어 묻었다고 하니 그 수는 부지기수이다.
현재 풍암리 주민 중 음력< 陰曆 > 10월 22일이 되면 30여 호가 기제사를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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