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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모의탑 - 혁명으로의 첫걸음, 사발통문 거사 계획을 기념하여 건립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이 탑은 정읍군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언덕 위에 사발통문 서명자 후손들이 1969년 4월 사발통문(沙鉢通文) 거사 계획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4개의 기단 위에 세워진 이 모의탑(謀議塔)에는 사발통문 서명자 20명의 생몰연대와 그 후손들의 거주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

사발통문은 고부에서의 봉기를 민란으로 보느냐 혁명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를 규명하는데 아주 중요한 사료이다. 만약 이것이 진본이라면 고부의 첫 봉기부터 혁명의 밑그림이 그려졌다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발통문이 발견된 것은 1968년 12월 4일로 신중리(新中里) 주산마을에 사는 송기태(송국섭의 아들)씨 집에서였다. 본문과 뒷부분이 떨어져 나가 그 전부를 밝힐 수 없지만 통문에는 전봉준을 비롯한 20명의 서명자 명단이 주모자를 알 수 없게끔 사발을 엎어놓고 둥근 원 주위에 한자와 한글로 병기되어 있다.
통문은 우여곡절 끝에 현재는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발견 당시 최현식(崔鉉植, 77세, 전 정읍문화원장) 선생은 사발통문을 김상기(金庠基) 박사에게 감정을 의뢰하였던 바, 감정결과 서명자의 필적이 동일인으로 되어 있다는 점과 지질과 먹색으로 보거나 발견경위로 보아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고 하였다 한다. 이로 말미암아 사발통문의 진본 여부는 학계의 진위 해석을 분분하게 하였다.

사발통문이 작성된 곳으로 알려진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은 사발통문에도 나와 있듯이 원래는 고부 서부면 죽산마을이었다. 사발통문이 작성된 송두호의 집 안방은 전봉준 장군의 아버지인 전창혁(全彰赫)이 장두(將頭)로 나섰다가 몰매를 맞고 돌아와 치료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임두영(林斗榮)씨가 살고 있는데 앞집(지금은 소막이 되어버린)은 당시 훈련대장이었던 송대화(宋大和)의 집이다.

이 집 주인 임두영 씨가 같은 마을 박기석(朴基錫, 69세)씨와 더불어 증언하는 얘기는 들어 볼 필요가 있다.
혁명 모의탑에 기록된 20명 중 15세의 가장 어린 나이로 가담한 송국섭(宋國燮)은 기록에서 빼어야 한다고 한다. 사발통문이 발견될 당시 노오랗게 바래버린 창호지에는 박준(朴準)이 기록되어 있으나 송국섭은 분명히 없었다는, 그리고 똑똑히 자기방(송두호 집 안방)에서 보았다는 증언이고 보면 후에 기록을 바꾸어 놓았다는 얘기가 된다. 당시 박준은 필적이 아주 좋아서 사발통문을 직접 기록하였고 종내는 사발통문을 기록했다는 죄목으로 고부관아에 잡혀가서 모의에 가담한 사람들을 실토하지 않으려고 혓바닥을 깨물어 입안에 피가 낭자한 채로 자결하였다는 증언도 함께 한다.

임두영 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사발통문의 원본을 소지한 사람은 해방 직후 정주출신의 송모라는 동아일보 기자였는데 불행하게도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모의탑을 세우면서 사발통문을 넣어 두었다가 말썽이 자꾸 나자 어느날 짐브로크로 모의탑을 들어 올려 사발통문을 흔적도 없이 가지고 가버렸다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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