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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 - 헌종의 사랑이 깃든 소박한 건물

by 넥스루비 2007. 8. 7.
서울 종로구 와룡동

대조전을 나와 희정당을 뒤로하고 후원(後苑)을 향해 가다보면 창경궁 쪽 낮은 언덕 아래에 낙선재가 보인다.
낙선재는 지금 창덕궁에 속해 있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원래는 창경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다.
이 건물은 본래 국상(國喪)을 당한 왕후들이 소복(素服)으로 은거하던 곳이므로 상중에 근신하는 황후가 소박한 건물에서 예를 갖추는 법도를 지키도록 하여 단청도 하지 않았다. 후원은 절제되면서도 조화 있는 조경으로 꾸며져 있다.

1847년(헌종 13년)에 창건되었으며 구한말 1926년 순종이 돌아가신 뒤 윤비(尹妃)가 이곳에서 은거하다가 생을 마감하였으며, 일인들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일본여인 방자여사와 정략 결혼한 비운의 영친왕 이은(李垠)이 1963년 병든 몸으로 환국하여 살다가 간 곳이기도 하다.

낙선재의 규모의 430칸 가량이다. 생각보다 넓은 터에 여래 채 건물이 들어서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은 상당수 사라졌다. 건물의 이름도 틀린 것이 지금과 「궁궐지」사이의 시간차에 따른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낙선재는 헌종(憲宗 24대, 재위 1834-1849)이 즉위한지 13년(1847)되던 해 낙성을 본 건물이다. 헌종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이 건물을 지었다고 전해 온다. 헌종은 임금이 되고서야 왕비를 맞이한다.
왕대비(순조의 비, 순원황후)가 주관하는 국혼령(國婚令)이 발동되고 3단계에 걸쳐 왕비감을 간택한다. 세 번째 간택때가 되면 세 여인만 남는다. 그 중의 한 여인이 왕비로 낙점을 받아 혼사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헌종은 낙점에서 떨어진 두 번째 연인 김씨성을 가진 여인이 마음에 들었다.
그와 왕혼(王婚, 임금이 선택한 여인과 동거하는 혼인)을 하고 사랑에 빠졌다. 사랑하는 김씨여인을 위해 왕비전에서 멀리 떨어진, 그것도 궁이 다른 창경궁에, 그러면서도 쉽게 다닐 수 있는 자리에 집을 지었다. 낙선재가 간직하고 있는 얘기다.

낙선재는 ㄱ자형 조촐한 집이다.
낙선재에서 주의깊게 볼 것은 창살무늬이다. 그것들이 놓인 위치에 따라 변화있고 아름답게 설치 되어있다.
건넌방에서 작은 마루방인 내루로 올라가는 문은 둥근 만월문이다. 건물 내부에 이런 만월형의 보름달 문이 만들어지는 일은 쉽지 않다.
대청에 앉아 장락문이 있는 행각을 보며 그 중에 살대무늬가 아름다운 분합문도 눈에 띄일 것이다. 동편 샛담의 꽃무늬도 의미가 담겨져 있다. 뜻을 읽자면 '여기는 사귀를 물리친 청정의 세계이다. 그 속에서 님과 함께 무궁무진하게 살고싶다.'이다.

낙선재가 사랑채에 해당한다면 석복헌(錫福軒)은 안채인 셈이다.
살림살이에 요긴한 시설이 마련되어 마치 여염집 같은 분위기이다. 헌종이 사랑한 김씨는 조용하고 소박한 여인이었던가 보다.
이 집은 마지막 왕손 이구씨가 결혼하였던 외국인 여인이 한동안 살았던 집이다. 그래서 편의에 따라 유리창문이 등장하였고 처마끝에는 양궐의 보철이 설치되기도 하였었다. 물론 지금은 없어졌지만.

낙선재
낙선재 by mushman1970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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