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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재와 무민당 - 고산이 세상을 등지고 살던 곳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 부용리

1637년(인조15) 병자호란으로 치욕의 화의를 맺는 등 어수선한 세상을 떠나 탐라로 향하던 고산이 이곳 부용동에 들어와 맨 처음 터를 잡은 곳이 낙서재이다.
부용동에 들어와 1671년 85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무려 일곱차례나 드나들며 12년여 머물었던 이곳 부용동.
부용동에서 고산이 주로 생활한 공간은 격자봉(格紫峯, 435)의 혈맥이 세번 꺾어져 내려오면서 소은병(小隱屛)이란 바위가 있는 이곳 바위 밑에 초가로 집을 지었다가 후에 잡목을 베어 세칸 집을 지었으니 낙서재(樂書齎)였다.

낙서재는 사방으로 퇴를 달아 매우 컸다.
1653년 2월 낙서재가 남쪽에 잠을 자는 한 칸 집인 외침(外寢)을 짓고 세상을 등지고 산다는 뜻에서 무민당(無愍堂)이라는 편액을 단다. 무민당도 사방으로 퇴를 달아 매우 넓으며 기둥도 높게 써서 천정에는 반자를 했다. 그리고 무민당 옆에 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으며 낙서재와 무민당 사이에 동와(東窩)와 서와(西窩)의 움집을 각 한칸씩 지었다. 이런 집들은 조각이 없이 간결한 집이었으나 기둥이 높아 반자의 천정을 갖춘 집이었다.
동와(東窩)와 서와(西窩)는 세상의 명리를 떠나 꾸밈없는 집이란 뜻이다.

낙서재 뒤에 있는 소은병(小隱屛)은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에 있는 대은병(大隱屛)과 마주한 소은병(小隱屛)을 본딴 것이다. 그리고 주자가 무이산(無夷山)에 무이정사(無夷精舍)를 지어 은둔한 것고 같이 고산도 부용동 격자봉 밑에 낙서재를 지어 은둔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조 선비들에게 주자와 무이구곡은 학문과 사상의 이상향이었다. 그리하여 주자와 같이 세상의 명리(名利)를 버리고 산간에 은둔하는 행동철학이 선비로서 취해야 할 가장 고귀한 일인줄 알았다. 율곡의 석담구곡(石潭九曲)이 그렇고 퇴계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이 그렇다.

고산의 낙서재 생활은 제자들에게 강학(講學)하는 것이 본분이었다.
고산은 낙서재 앞의 산이름을 미산(微山)이라 하여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 죽은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절의를 기리고 미산 옆의 산봉우리를 혁희대(赫羲臺)라 하여 굴원(屈原)의 옛고사를 더듬었으니 참소에 의해 호나라에서 쫓겨난 굴원이 장사(長沙)의 박라수(泊羅水)에 빠져 죽으면서 나라를 걱정한 높은 절의를 빌어 충의의 단심(丹心)을 표현한 당시 유학자로서의 윤리를 지키려 한 고산의 노력이 완연하다.

지금 고산 당대의 4동의 집터는 옛날의 상태를 찾아보기 어렵게 인멸되어 있다.
1981년 간단한 지표검사겸 간이 발굴조사를 하였다.
격자봉 중턱 해발 100~110m의 산속에 지금은 남북으로 11m, 동서로 12m의 집터가 남아 있는데 이 집터에는 자연석 주춧돌과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으며 개인 본묘가 2기 있어 더 이상 발굴 조사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낙서재터 뒤에 있는 소은병은 높이 2.5m, 넓이 약 16평(55.3㎡) 정도의 바위.
그 윗면에는 길이 80cm, 한변 60cm이며 깊이 21cm 정도인 홈이 패여 있는데 인공으로 다듬은 흔적이 보인다. 또 빗물의 배수를 위해 석구(石溝)를 파서 빗물이 고이면 바위벽을 타고 흘러내리게 되어 있다. 고산은 엄동설한에도 이곳에서 북쪽을 향해 앉아 사색에 잠기기도 한 곳이라 한다.

낙서재 앞뜰에는 거북바위(龜岩)가 있었다.
고산은 4령(四靈, 기린, 용, 봉황, 거북)이라 하여 절의(節義)의 상징으로 여기고 저녁이면 귀암에 앉아 완월(玩月)을 즐겼다. 현재 귀암으로 추정되는 둘이 개인분묘의 축대로 묻혀 있는데 한쪽의 측면이 2.8m 정도의 바위이다.

〈보길도지〉에서는 고산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 학관(學官)이 낙서재 지역을 일부 개수(改修)하였다고 적고 있다. 학관의 아들 미관대에 와서는 내침(內寢)이 협소하다하여 나무를 써서 극히 사치스럽게 오량각(五梁閣0을 짓고 귀아도 매몰되는 등 고산의 낙서재 옛모습이 크게 변형되었음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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