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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 흥망성쇠의 유서 깊은 역사의 경주남산

by 넥스루비 2016. 6. 20.

경부고속도로에서 경주로 들어서면 광활한 평야에 납작 엎드린 산이 있다. 바위가 허옇게 드러나고 푸른 기운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척박하기 그지없는 산이다. 그러나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신비로움이 넘치는 산으로 신라인의 '부처산'이자 이상형인 남산이다. 남산은 서라벌 남쪽에 우뚝 솟은 해발 468m의 금오산과 494m의 고위산에서 뻗어 내린 약 40여 개의 등성이와 골짜기를 말하며 180여 개의 봉우리가 있다.

경주남산은 서라벌 남쪽에 우뚝 솟은 해발 468m의 금오산과 494m의 고위산에서 뻗어 내린 약 40여 개의 등성이와 골짜기를 말하며 180여 개의 봉우리가 있다.온 산 넓게 펴진 자락마다 아득히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는 흥망성쇠의 유서 깊은 역사와 간절한 전설이 서려있고, 신라인들이 1천년 동안 '불국토(佛國土)로 여겨왔던 곳이다. 남산은 절터와 불상이 각각 1백개가 넘고 석탑도 80여개에 이르고, 수많은 고분과 왕릉이 어우러진 골짜기마다 문객들은 옷깃 여미어 향가를 읊고 금오신화를 지으며 함께 호흡하였으니 남산은 실로 야외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많은 역사 유물과 유적으로 인해 하루 또는 이틀 일정으로 남산을 이해하기는 어려우나, 아쉬운대로 용장골을 거슬러 남산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용장사(茸長寺) 터 만이라도 제대로 본다면 과연 남산이 불국토(佛國土)이다는 것을 깨닫을 수 있다. 용장골은 남산의 대표적 봉우리인 금오봉(金鰲峰, 486m)과 고위봉(高位峰, 494m) 사이에 있다.

이러한 유서 깊은 산이라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으나, 막연히 남산이 좋다는 소문만으로 찾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남산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곳곳에 서려있는 역사적 가치를 체계적으로 보고 느낄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 남산과 망산
  •   아주 오랜 옛날이다. 서라벌은 산도 물도 복된 웃음으로 차 있는 평화로운 고장이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곳을 두 신(神)이 찾아 왔다.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자 신과 둥근 얼굴에 샛별 같은 눈동자가 반짝이는 여자 신이었다. 두 신이 아름답고, 기름진 이곳 경치를 둘러 보다가 남자신이 입을 열어 외쳤다. 아! 우리가 살곳은 이곳이구나! 이 소리는 우뢰처럼 들판을 진동하고 울려 퍼졌다.

    이때 강가에서 빨래하던 한 처녀가 신들이 외치는 우뢰같은 소리에 놀라 소리나는 곳을 바라 보았다. 거기에는 산과 같이 거대한 두 남녀가 자기쪽으로 발을 옮겨 걸어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겁에 질린 처녀는 "산 봐라. 사람살려"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산과 같은 사람봐라" 해야 할 것을 그만 급하고 놀란 나머지 "산봐라"하고 외쳤던 것이다. 발 아래서 들려 오는 비명소리에 신들은 그만 발을 멈추었다. 그랬다가 다시 발을 옮기려 했으나 옮겨지지 않았다. 신들은 각각 그자리에 산으로 변해서 솟아 버렸다. 처녀가 힘을 다해 외친대로 그 자리에서 산으로 변한 것이다.

    남자신은 검붉은 빛깔로 울퉁불퉁강하게 생긴 바위로 된 등성이들이 모여 이루어진 남산(南山) 되었고, 여자신은 남산 서쪽에 부드럽고, 포근하게 생긴 망산(望山)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남산과 망산은 한쌍의 신들이 변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망산 곁에는 젊고, 푸른 벽도산과 선도산이 얌전한 망산을 쉴새없이 유혹을 하나 그래도 망산의 머리는 언제나 남산쪽으로 향해 절개를 지키고 변치 않고 있다.

    그후 남산은 하늘 위의 부처님들이 내려와서 거쳐가는 성산으로 신앙되어 많은 절이 세워지고, 바위마다 부처가 새겨지고, 탑이 서는 명산으로 남아 있고, 망산은 무운을 기도하던 산으로 지금은 오랜 가뭄이 계속되면 기우제를 지내는 산으로 알려지고 있다.
  • 남산의 삼화령
  •   삼화령의 불상에 관해서는 『삼국유사』에 언급이 있다. 선덕왕 때 석생의(釋生義)라는 스님이 도중사(道中寺)에 살고 있었다는 한다. 어느날 밤 꿈에 한 스님이 그를 데리고 남산에 올라가서 풀을 묶어 표시를 하게 하고 산 남쪽 골짜기에 와서 말했다.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은 나를 꺼내어 고개위에 편하게 묻어주시오"

    꿈을 깨자 생의스님은 곧 친구들을 데리고 표해 놓은 곳을 찾았다. 그 골짜기에 이르러 땅을 파보니 과연 석미륵(石彌勒)이 있었으므로 그것을 삼화령 위로 옮겼다. 선덕왕 13년(644년)에 그곳에 절을 지어 머물면서 훗날 절 이름을 생의사(生義寺)라고 하였는데 후에 잘못 전해져 성의사(性義寺)라고 하였다.

    이 설화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생의사의 석미륵이 남산 삼화령위에 안치되었다는 사실과 둘째, 이 불상은 운반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마애불이나 거대한 석불(石佛)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훗날 이 부처님은 충담스님과 기이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경덕왕 때의 일이라고 한다. 왕은 3월 3일 귀정문(歸正門)의 누각에 올라가서 측근에 있는 이들에게 말했다. "누가 도중에서 위의(威儀)있는 스님 한 사람을 데리고 올 수 있겠소?" 이때 마침 모습이 깨끗한 스님이 이리저리 거닐면서 지나갔다. 측근신하가 바라보다가 그 스님을 데리고 와서 뵈었다. 왕은 말했다. "내가 말하는 위의있는 스님이 아니다" 왕은 그를 물리쳤다.

    다시 스님 한 사람이 앵통(櫻筒)을 걸머지고(혹은 삼태기를 걸머졌다고도 한다)남쪽에서 왔다. 왕은 기뻐하면서 그를 보더니 곧 누각위로 맞아 들였다. 스님의 통속을 보니 다구(茶具)만 담겨 있을 따름이었다. 왕은 물었다. "스님은 누구시오?" "저는 충담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오시오?" "저는 늘 중삼(重三:음력 3월 3일)과 중구(重九:음력 9월 9일)날이 되면 차를 다려서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彌勒世尊)께 드립니다. 오늘도 그날이라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나에게도 또한 차 한잔 주시겠소"

    스님은 이에 차를 다려서 왕에게 드렸는데, 차의 맛이 이상하고, 그 그릇 안에서 이상한 향기가 풍겼다. 왕은 말했다. "내 들으니 스님은 기파랑(棄婆郞)을 찬미한 사뇌가(詞惱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하니 과연 그러하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백성을 잘 다스려 평안히 할 노래를 지어주오"
    스님은 즉시 칙명(則命)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은 그를 가상히 여겨 왕사(王師)로 봉하니 스님은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스님이 지은 안민가(安民歌)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군(君)답게 신(臣)답게, 민(民)답게 할지면 나라는 태평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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