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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탈 - 발에다 탈을 걸어 앉아 노는 것

by 넥스루비 2007. 8. 7.
경기도

발탈은 발에다 탈을 걸어 앉아 노는 것으로서 그 시원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70∼80세의 사람들이 어렸을 때 보았다고 증언한 것으로 보아 이미 한말 때부터 있어온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발탈의 발생과 변천에 대한 고증자의 말을 들어보면 당초에는 정애비(허수아비)로 만든 인형(제웅)의 머리부분을 발바닥에 씌우거나 종이가면을 발에 씌우고 팔은 노끈으로 연결하여 그것을 당기거나 놓으면서 조종했다고 한다. 그 후 광무대< 光武臺 > 시절에 박춘재(朴春才 작고)는 노끈을 꿰어 조작한 것이 아니라 직접 손에 한삼을 끼고 연희하였으며, 남형우(南亨佑 작고)는 양팔 끝에 노끈을 연결해서 그 노끈을 위로 올려 대나무에 연결하고 그 나무를 양손으로 조종하면서 발탈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발탈의 현보유자인 이동안은 노끈에서 변화된 대나무로 조작하는 탈놀이와 박춘재가 하던 손에 한삼을 꿰어 하는 탈놀이 등 두 가지를 모두 해왔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손에 한삼을 꿰고 하는 것은 손놀음이 불편할 뿐 아니라 장기간 연희하기가 어렵기 때문으로, 포장을 치고 그 안에 누워서 발만 관중에게 내놓고 대나무로 팔을 움직여서 연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발탈에 대하여 전통예능인의 견해를 들어보면 대체적으로 발생을 경기도 남사당패< 男寺黨牌 >가 행한 꼭두각시놀음의 변형으로 보거나, 아니면 유랑예인들에게서 파생되었다고 하며 그것이 협률사< 協律社 >를 거쳐서 광무대와 가설극장< 假說劇場 >또는 창극단< 唱劇團 > 등으로 이어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렇게 볼 때 발탈연희의 발생지는 일단 안성< 安城 >의 남사당패놀이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유력해지며 이것이 중부지방일원에서 연희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 현존하는 발탈을 보면 우선 탈판의 구조는 검은 포장으로 가로 약 2m, 세로 약1m 정도의 포장막< 布帳幕 >을 4각으로 짜서 탈꾼은 그 속에 누워서 발만 포장 앞으로 내놓는다. 거기에다 탈을 씌우고 상의를 입혀 그 속에 대나무를 꿰어서 그것을 양손에 잡고 조종하면서 논다. 그 형식은 탈꾼인 경우 발의 움직임과 손의 움직임을 기본으로 하여 노래와 춤 그리고 재담 등으로 엮고, 포장막 밖에서는 어릿광대가 탈꾼을 상대해주고 양옆에서는 삼현육각< 三絃六角 >이 반주를 맡아하게 된다. 그런데 발탈의 연희대본을 분석하여 보면 팔도유람가< 八道遊覽歌 >를 비롯하여 각 도의 노래가 나오지만, 주로 경기잡가< 京畿雜歌 >가 많이 나온다. 그리고 발탈놀이의 배역은 천민인 조기장수 역을 하는 탈꾼과 조역인 어릿광대, 잠시 비친 여자역 등 세 사람이 하게 되는데 이때의 재담은 주로 무엇을 잡아먹는 이야기와 조기를 헤아리는 이야기 그리고 약 먹는 이야기 등이 나온다. 그 속에는 잔재주나 장난기, 거기에다 사회를 보는 비판력과 관찰력이 예리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 예능은 풍자적이고 해학적이고 추하기까지 하나 한편으로는 인간적이고 속임없이 폭로하는 등 짓눌렸던 당시의 서민들의 애환을 꾸밈없이 담고 있다는 데서 여타의 각 지역 탈놀이에 담긴 내재적 성격과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이동안이 하고 있는 발탈은 그 성격이 줄인형이 변화된 장대인형극적 양식을 갖춘 탈놀이로서, 광대들이 규모를 작게 하여 연희한 예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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