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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월성 -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왕궁...반월성

by 넥스루비 2007. 8. 7.

안압지 동남편에 있는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왕궁인 월성은 흙과 돌로 쌓은 도성(都城)으로 현재는 부분적으로 성벽과 건물지만 남아있다. 이 성의 모양이 반달과 같다고 하여 반월성(半月城), 신월성(新月城)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곳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다. 성안이 넓고 자연경관이 좋아 궁성으로서의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월성에 대한 이칭(異稱)으로 반월성이 보편화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월성은 시조인 혁거세가 금성(金城)을 짓고 난 뒤 138년 뒤인 신라 제 5대 파사왕 22년인 101년에 축조되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290년(유례왕 7) 큰 홍수로 인하여 월성이 무너져 이듬해에 보수하였으며 487년(소지왕 9)에 다시 왕이 이곳으로 이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래 성안에는 남문과 서문격인 귀정문(歸正門), 북문, 인화문(仁化門), 현덕문(玄德門), 무평문(武平門), 준례문(遵禮門) 등의 문과 월상루(月上褸), 망덕루(望德褸), 명학루(鳴鶴縷), 고루(鼓樓) 등의 누각과 왕이 정사를 돌보던 남당(南堂 : 都堂), 신하의 조하(朝賀)를 받고 사신을 접견하던 조원전(朝元殿), 삼궁(三宮 : 大宮, 梁宮, 沙梁宮)을 관할하던 내성(內省) 등 많은 건물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그 흔적만 남아있다.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 만든 석빙고(石氷庫)만 남아있다. 또한 경주 석씨(慶州昔氏)의 시조를 모시고 숭신전(崇信殿)도 있었으나 1980년 석탈해왕릉(昔脫解王陵) 동남쪽으로 옮겨졌다. 통일 신라기에는 동쪽의 명활산성(明活山城), 서쪽의 서형산성(西兄山城, 일명 仙桃山城), 남쪽의 남산성(南山城), 북쪽의 북형산성(北兄山城)이 나성(羅城)으로 호위역할을 하였고 주위에는 사방으로 해자(垓字)가 둘러져 있어 왕성을 보호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석탈해가 원래 호공(瓠公)의 거주지인 이곳을 거짓꾀를 부려 호공을 몰아내고 차지했다는 전설도 전하며,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난 때 김유신과 김춘추가 이곳을 근거지로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경덕왕과 충담사(忠談師)의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등에 얽힌 이야기도 전한다.

경주 석빙고 -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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