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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계곡 선각육존불 - 다듬지않은 자연 암반위에 자유로운 필치로 그린 그림

by 넥스루비 2007. 8. 7.

마애관음상에서 100m 더 들어가면 동북쪽에서 흘러드는 한지류가 있다. 그 지류가 본류에 합치는 동쪽 언덕위에 병풍을 둘러 놓은 듯한 절벽바위가 동서로 두 곳에 있다. 이곳이 이승과 저승의 교차점인 냉골 제2절터이다. 서쪽바위는 높이가 약4m이고 너비는 약3.58m이며 동쪽바위는 서쪽바위면에서 약3m 뒤에서 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높이는 역시 4m 정도이고 너비는 7.27m이며 동서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다. 

다듬지않은 자연 암반위에 자유로운 필치로 그린 그림을 선각으로 새겼으니 조각이라고 하기보다는 그림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것이다. 구김살없는 필치는 능숙한 필력을 보여주고 있다. 동쪽암면에 새겨진 본존석가여래는 넓은 연꽃위에 앉아 있고 문수.보현 두 보살은 본존의 양옆에 서있다. 여래상은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가사를 입고 오른손은 설법인으로 가슴에 들고 왼손은 무릎위에 선정인으로 놓여있다. 

둥근원으로 신광과 두광을 나타냈는데 단숨에 그어진 유창한 곡선은 한없이 시원스럽다. 왼쪽의 문수보살은 마멸이 심하여 모습을 잘 알수없으나, 연꽃위에 서서 오른손은 설법인으로 가슴에 들고 왼손아래로 드리운채 천의자락을 잡고 잇는 듯하며 얼굴은 여래쪽으로 돌리고 있다. 오른쪽 보현보살은 손등을 밖으로 하여 손가락 끝을 아래로 드리우고 연꽃위에 서 있다. 두 보살은 모두 세개의 구슬을 꿴 목걸이를 걸고 팔과 손목에 팔찌를 끼었을 뿐 상의는 입지 않았다. 두 보살이 여래쪽으로 비스듬히 향하고 서있으므로 바위 분위기는 아늑하게 통일되어 있다. 

서쪽 암면의 아미타삼존은 석가삼존과 반대로 여래가 연꽃위에서 계시고 양쪽 협시보살은 연꽃위에 앉아 있다. 여래는 오른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가슴에 들고 왼손바닥은 위로 하여 배 앞에 들고 있다. 가사는 편단우견으로 몸에 걸쳤는데 신광은 없고 두광만 원으로 나타나 있다.
왼쪽의 관세음보살상은 여래쪽으로 향해 輪王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는법)로 앉아 꽃쟁반을 들었고 오른쪽의 대세지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반대모습으로 앉아 역시 꽃쟁반을 들고 있다. 

두 보살은 모두 둥근 구슬목걸이를 걸었고 팔과 손목에는 팔찌를 끼었다. 어깨에는 얇은 천의를 걸쳐 천의자락에 나부낀다. 여래가 앉아 계시고 협시보살들이 서는 예는 보통있지만 여래께서 서 계시고 보살들이 앉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생전에 나무아미타불을 많이 부르고 착한 일을 한 사람이 죽으면 아미타여래가 보살들을 데리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맞으러 지상으로 하강하신다. 그때 여래는 서고 보살들은 앉는데 이러한 모습을 내영아미타여래상(來迎阿彌陀如來像)이라고 부르는데 이로 미루어 서쪽 암면 삼존상은 내영아미타상임을 알 수 있다. 

석가여래는 살아있는 생명을 다스리는 부처이고 아미타여래는 극락의 부처이다. 아미타여래는 지상에 하강하여 석가여래로부터 생명을 인계 받는다. 이곳에 석가삼존과 내영아미타삼존이 새겨져 있는 것은 이승에서 저세상인 극락세계로 생명이 인계되는 중요한 장소라는 뜻이다. 신라시대에는 많은 자녀들이 이곳에서 돌아가신 부모님들을 극락에 모시기 위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했을 것이다. 

바위위에는 홈을파서 빗물이 바위면을 적시지 않게 물길을 돌려 놓았다. 또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고 많은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으니 바위위에 빗물을 가리는 간단한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신라시대 조각품은 많이 볼 수 있으나 그림은 거의 볼 수 없는데, 이곳에서 신라의 그림을 엿볼 수 있으니 귀한 유적이 아닐수 없다. 이 불상의 제작시기는 이상주의적 양식이 성행하던 8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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