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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소영정 - 조선 초기 공신도상을 대표하는 가품(佳品)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223

손소(1433∼1484) 선생은 조선< 朝鮮 > 초기< 初期 >의 무인< 武人 >으로서, 자< 字 >는 일장< 日章 >, 시호< 諡號 >는 양민< 襄敏 >이다. 세조< 世祖 > 9년(1463)에 문예시< 文藝試 >에 장원< 壯元 >, 성균주부< 成均主簿 >, 병조좌랑< 兵曹佐郎 >을 지내고 세조 13년(1467) 이시애< 李施愛 >의 난< 亂 >때 종묘서령< 宗廟署令 >으로 강순< 康純 >의 종사관< 從事官 >이 되어 출정< 出征 >, 난이 평정된 뒤 적개공신< 敵愾功臣 >이 되어 내섬시정< 內贍寺正 >에 특진했다. 그후 성주목사< 星州牧使 >, 공조참의< 工曹參議 >를 거쳐 계천군< 溪川君 >에 봉해지고, 안동부사< 安東府使 >, 진주목사< 晋州牧使 > 등을 역임했다. 『양민공신유사< 襄敏功臣遺事 >』에 의하면 공의 나이 44세에 "상명충훈부도화제공신영상< 上命忠勳府圖畵諸功臣影像 > 사급장우본가< 賜給藏于本家 >"라 하였으니, 적개공신상이 그려진 것은 공신호< 功臣號 > 책록< 冊錄 > 후 10년이 경과한 성종< 成宗 > 8년(1477)이 된다. 현재 전해오는 손소영정은 바로 이 적개공신상으로 믿어진다. 오사모< 烏紗帽 >에 야청색포< 鴉靑色袍 >를 입고, 공수< 拱手 >자세를 취한 전신좌상< 全身坐像 >으로서 안면< 顔面 >은 좌안7분면< 左顔七分面 >이며 몸체는 8분면을 취하고 있다. 중폭< 中幅 >을 대폭으로 하고, 좌우 양쪽을 결봉< 結縫 >한 형식, 아무 것도 깔려있지 않는 바닥, 각지게 처리한 의복의 외곽선< 外廓線 >, 선염기< 渲染氣 >가 전혀 삽입되지 않고 갈색선으로 이목구비< 耳目口鼻 >만을 표시한 점 등은 조선 초기의 초상화법< 肖像畵法 >을 여실히 예시한다. 진본< 眞本 >이 수폭밖에 전해오지 않는 현재, 손소영정은 조선 초기 공신도상을 대표하는 가품< 佳品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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