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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국내여행지/사찰 (266)
국내여행 Travel
지리산 동남쪽 화개장터 근처에 위치한 대사찰. 화개장터에서 이 절 입구까지는 벚꽃이 계곡과 잘 어우러진 곳으로 유명하다. 신라 성덕왕 23년(723년) 의상대사의 제자인 삼법이 세웠는데 창건 설화가 함께 전해진다.삼법은 당나라에서 "육조 혜능의 정상(頂相)을 모셔다가 삼신산의 눈 쌓인 계곡위 꽃이 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귀국한 뒤 지금의 쌍계사 금당자리에 이르러 혜능의 머리를 묻은 뒤 절을 세우고 이름을 옥천사(玉泉寺)로 불렀다고 한다. 그 후 840년에 진감국사가 중국에서 차의 종자를 가져와서 절 주위에 심고 지금의 절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벽암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 입구에 '쌍계석문' 이라고 적힌 큰 암석이 있다. 이 글씨는 신라말의 대..
강원 인제군 북면 설악산 소청봉 북서쪽에 있는 사찰로 백담사의 말사이다. 오대적멸보궁 가운데 하나로 불교도들의 순례지로서 유명하다백담사 - 만해 한용운이 출가사이며 그가 '님의 침묵'을 썼던 곳
예천읍에서 북쪽에 있는 소백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사찰. 이 고장 출신 두운선사가 신라 경문왕 10년(870)에 창건 하였다고 한다. 고려 태조 왕건에 얽힌 전설로 더 유명하다. 전설에 따르면 왕건이 삼한 통합의 큰 뜻을 품고 두운선사를 방문하고자 마을 입구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바위 위에서 쌍용이 나타나더니 절로 가는 길을 인도 했다고 하여 태조는 산 이름을 용문산, 절 이름을 용문사라 명명했다는 것이다. 고려 명종 1년(1171년)에 태자의 탯줄을 절의 왼쪽 봉우리에 묻고 창기사로 절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그 뒤 조선 성종 9년(1478년) 세종대왕의 왕비인 소헌왕후가 태실을 봉안하고 다시 절 이름을 성불산 용문사로 바꿨으며 정조때 소백산 용문사로 부르기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 절에는 맛배..
단장면 구천리 재약산에 있는 사찰. 임진왜란때 법력으로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의 정신을 계승하는 우리나라 호국불교의 근본도량. 신라 진덕여왕 때 창건되어 처음에는 죽림사라 불렀다고 한다. 그후 신라 흥덕왕 4년(829년) 황면선사가 중건하였다고 하며 절 이름이 영정사로 바뀌었다. 절 이름이 바뀐 것과 관련하여 설화가 전해진다. 흥덕왕의 셋째 왕자가 나병에 걸려 명의와 명약을 찾던 중 이곳의 영정(靈井) 약수를 마시고 병이 나았다. 이에 왕이 크게 기뻐하여 이곳 절 이름을 재약산(載藥山) 영정사(靈井寺)라 하였다고 한다. 고려 충렬왕 때 일연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탈고하였다. 충렬왕은 이 곳을 찾아와서 천하 명산이요, 동방 제일의 사찰이라며 감탄하였다고 전해진다. 신라와 고려에 걸쳐 보우국사 일연..
돌탑, 거대한 불두(佛頭), 와불(누워 있는 부처), 석가모니 고행상 등 연화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와우정사에는 이국적인 풍경이 가득하다. 이 절은 1975년 실향민 출신인 해월 법사가 실향민의 아픔을 민족화합과 통일의 의지로 승화시키기 위해 지었다.석굴 법당인 열반전에 안치된 높이 3m, 길이 12m의 거대한 와불은 인도네시아에서 들여온 향나무를 통째로 깍아 만들었다고 한다. 누워있는 부처중 세계 최대 규모.대각전에는 석가모니 고행상이 안치돼 있다. 석가모니의 6년간의 고행을 형상화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뿐이다. 사찰 입구에는 높이 10m의 불두가 있다. 황동 5만 근을 들여 10년에 결쳐 만들었다는 황동 5존불, 무게가 12톤에 이르는 통일의 종 등도 이채롭다. 정성들여 쌓은 돌탑군들도 이국적..
금산사는 미륵신앙 곧 신라오교의 하나인 법상종(法相宗)의 근본도량으로서 이 지역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다. 신라오교(新羅五敎)란 열반종(涅槃宗, 무열왕때 보덕화상에 의해, 전주 경복사), 계율종(戒律宗, 선덕여왕때 자장율사에 의해, 양산 통도사), 법성종(法性宗, 문무왕때 원효대사에 의해, 경주 분황사), 화엄종(華嚴宗, 문무왕때 의상대사에 의해, 영주 부석사), 그리고 경덕왕때 진표율사에 의한 금산사의 법상종(法相宗)을 이른다. 한편 금산사는 후백제의 견훤이 그의 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에는 법상종의 대종사이자 왕사인 혜덕 소현이 1079년(문종 33) 주지로 부임하여 퇴락한 절을 보수하고 새로운 법당을 증축하여 창건 이후 가장 큰 규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1598년(조선 선조..
신라 신덕왕 2년(913년)에 대경대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진덕여왕 3년(649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각각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다.창건 당시 당우가 304칸에 달했으며 300여 스님이 머물렀다고 하니 대찰 이었음에 분명하다. 이 절은 입구에 있는 은행나무로 더 유명하다. 천년기념물 30호로 지정돼 있는 이 은행나무의 수령은 1천1백년이 넘는다. 의장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라고도 하고 신라의 마지막 왕자였던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면서 꽂아놓은 지팡이라고도 한다. 그래서인지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면 미리 알고 울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신령스러움 탓으로 조선 세종때 나라에서 이 은행나무에 정삼품의 직위를 하사하기도 했다.
천성산 기슭에 위치한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6.25때 불탄 것을 1958년 수옥 비구니가 재건했다. 현재 5~6동의 건물이 아담하게 단장되어 있으며 70여명의 비구니가 수도하는 비구니 도량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절 아래 6Km정도 뻗어있는 계곡은 소금강이라 불리울만큼 경관이 빼어나다. 절벽에 소금강이란 글자가 뚜렷하다. 기암괴석들이 즐비하고 바위가 길게 뻗어 있어 병풍바위라 불리는 것도 있다. 여름에는 계곡에서 더위를 식히려는 피서객들로, 봄 가을 겨울에는 등산객들로 붐벼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절 주변에는 성불암 금봉암 인적암 조계암 등의 암자가 있다.
파계사는 신라 애장왕 5년(804)에 심지왕사가 창건하였고, 그 후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불탄 원통전을 선조 38년(1605) 계관법사가 중창하였으며, 숙종 21년(1695)에 현응스님이 삼창하였다. 파계사는 조선 영조대왕과 인연이 깊은데, 다음의 이야기가 1935년에 세워진 '팔공산파계사사적비'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숙종 계유년(1693) 시월의 어느날, 임금은 예스럽고 소박하게 생긴 스님이 대궐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사흘 뒤 상서로운 빛이 궐내를 비추자 사람을 시켜 빛이 솟아나는 곳을 살펴보도록 하였고 남대문 밖에 쉬고 있던 파계사의 도승(道僧) 영원(靈源)스님을 뵙게 되었다. 숙종은 스님을 불러 손을 잡으며 기뻐하더니 수락산으로 가 칠성님께 왕자탄생을 위한 백일기도를 해 줄 것을 부탁했다..
김천역에서 서쪽으로 12km 떨어진 황악산 1천100m 준령에는 능여암 운수암 내원암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들 암자 가운데 직지사가 있다. 418년(신라 눌지왕 2년)고구려의 승려 묵호자가 지었다고도 하고, 468년(눌지왕 52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세웠다고도 전한다. 창건설화 등에 따라 조선시대 거승 사명대사의 본사로 불리어 진다. 직지사란 이름 그대로 손가락으로 가르쳤다는 뜻인데 이름의 연원은 여러가지로 전해지고 있다. (전설편, 역사편 참조) 천년 묵은 칡뿌리와 싸리나무 기둥으로 된 일주문이 주위의 오래된 노송들과 잘 어울린다. 이곳 가을 단풍은 계절이 다 가도록 오랫동안 지속돼 고찰의 분위기를 한껏 돋군다. 절 안에는 1천구의 아기 부처가 안치되어 있는 비로전(일명 천불전)이 볼만하다. 대웅전..
기백산 국립공원과 용추계곡을 곁에 둔 신라시대 고찰. 신라 소지왕 9년(484년)에 각연대사가 창건한 옛 장수사의 4대 부속 암자중 현존하는 유일한 사찰. 6.25 때 소실되어 1953년 안의면 당본리에 있는 봉황대에 별원을 차려 놓았었다. 그 뒤 꾸준한 복원 사업끝에 1959년에 원래 자리를 찾게 됐다. 이 절의 일주문은 옛 장수사의 것이라고 한다. 전통사찰 86호. 용추사 일주문 - 해인사의 일주문보다 규모는 작으나 건축수법은 훨씬 정교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갈 때 제일 먼저 통과하는 문으로 보통 보 방향에서 양가에 각각 기둥 하나로 지탱하는 건물이다. 용추사 일주문은 원래 각연대사가 세웠다는 장수사의 일주문이었다. 장수사는 수차례에 걸친 병화로 소실되어 없어졌고 부속 암자이던 용추사만이 남아 있었는데 6.25전쟁으로 불 타 버려 1959년에 다시 지어졌다. 용추사 일주문은 해인사의 일주문보다 규모는 작으나 건축수법은 훨씬 정교하다. 다포계 팔작지붕이며 정면에 공간포가 5구, 측면에 3구가 놓여 있고 정면과 측면의 공포 간격은 동일하다. 처마는 겹처마로 부연이 길며 추녀도 사래에 비해 짧고 단부는 복연화문 장식을 하고 있다. 한 때 허물어져 길가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다시 세우고 단청을 입혀,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현하였다. 용추사 - 국립..
백암산 정상에 우뚝솟아 학 날개를 펴고 있는 백학봉(722m)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백제시대 처음 지어진 절. 백제 무왕 33년(632)에 여환조사(如幻祖師)가 창건하여 백암사(白岩寺)라 칭하였고 고려 덕종 3년(1034년) 중연조사가 중창하면서 이름을 고쳐 정토사(淨土寺)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 선조 7년(1574년) 환양선사가 다시 중창하면서 현재의 백양사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 뒤 소실과 중건을 거듭해 오래된 건물로는 조선시대 지어진 극락전만 남아 있으며 나머지 건물 대부분은 1917년 송만암 대종사가 중건한 것이다. 송만암 대종사에 의해 교세와 사운이 융성해 졌으며 백양사 불교 강원을 통해 수많은 학승을 배출, 호남불교의 요람이 되었다. 백양사의 비자나무 분포 북방한계지대 - 백양사의 비..
옛날 용이 살다가 무지개를 타고 승천했다는 전설이 깃든 홍룡폭포, 폭포 바로 옆에 자그맣게 자리잡고 있는 절이 홍룡사이다. 옛날 원효가 이곳에서 설법을 하였다고 한다. 설법을 듣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홍룡폭포에서 몸을 씻었다 하여 낙수사(落水寺)라고 불렸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현재 이 절에는 대웅전 종각 요사 옥당 등이 있다. 천성산 - 해돋이를 가장 먼저 볼 수 있고, 피서철에는 계곡 피서를 즐기려는 인파가 끊이지 않는 산홍룡폭포 - 깎아 세운 듯한 바위는 위풍당당하고 흐르는 물의 기세! 물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물보라 사이로 무지개원효암 - 원효대사가 창건한 암벽 위에 자리잡고 있는 수도도량
덕주사는 덕주산성의 동문을 지나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곳에 위치. 월악산밑에 있으며 속담에 전하기를 덕주부인이 이 절을 세웠기 때문에 덕주사라 이름하였다. 동으로 45리 청풍과 경계를 이루는 상·하 덕주사가 있다. 지금의 마애불이 있는 절터를 상덕주사(上德周寺)라 하고 이곳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덕주사를 하덕주사(下德周寺)라 하였음을 알게 하며 오늘날에도 아래 덕주사와 윗 덕주사라고 부르고 있다. 신라 진평왕 13년(591)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나 소실되었고 현재 마애불 1구와 약간 허물어진 우탑(牛塔) 1기, 부도 4기가 있는데 부도 2기는 높이 1.2m, 폭 70㎝이며 다른 2기는 각 각 높이 1.37m, 폭 0.5m/1.6m, 0.5m 크기이다. 절 주변에는 수많은 와편(瓦片)과 주춧돌, 장대석..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지 24년째인 진흥왕 14년(553년)에 의신조사에 의해 창건됐다고 하는 고찰. '동국여지승람' 등에 따르면 의신이 인도에서 불법을 구하여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돌아오는 도중 장엄한 산세를 보고 속세를 떠나 불법에 안주할 수 있을만한 곳으로 여겨 그러한 뜻으로 법주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후 진표율사가 크게 확장했으며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중수된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수차례 중건되었다. 임진왜란때 소실됐다가 조선 인조 2년(1625년) 다시 복구된 후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한편에서는 삼국유사 동문서의 기록에 근거, 진표율사의 명을 받은 영심 스님이 세운 절이 길상사이고 이것이 후에 속리사로 바뀐 뒤 다시 법주사란 이름을 가지게 됐다는 설이 있으나 아직 정확한 것은 ..
오대산 동쪽 계곡의 울창한 수림 속에 위치한 오대산 최대의 사찰로 25교구 본사의 하나. 신라 상원사를 비롯해 오대암자 영감사 등 크고 작은 사찰과 암자를 말사로 거느리고 있다. 신라 선덕여왕 14년 중국에서 돌아온 자장율사가 오대사에 있는 지금의 절터에 임시로 머무를 초막집을 지은 것이 이 절의 창건이라고 전해진다. 그 뒤 고려와 조선 세조 때 크게 융성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 다각다층 석탑인 팔각구층석탑(국보 48호)과 석탑 아래 한쪽 팔을 기댄 채 공양을 드리고 있는 석조보살좌상(보물 139호), 중창권선문(보물 140호) 등이 남아있다. 칠불보전 영산전 진영각 등 주요 건물과 문화재는 6.25때 불타 버렸다. 특히 양양군 선림원터에서 출토되어 이 절로 옮겨져 있던 신라 동종이 소실된 것은 큰 손실..
오대산 비로봉 중턱에 위치한 사찰로 거대한 전나무 고목군으로 둘러싸여 있다. 신라 32대 효소왕 6년(699년)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 효명 두 왕자가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조선의 세조와 관련된 유물과 설화, 국보급 문화재 등으로 더 유명하다.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영험하다는 이 절에 찾아와 기도하던 중 동자로 변한 문수보살이 나타나 세조의 몸을 씻어주니 종기가 모두 없어졌다는 설화가 전해져 온다. 지금도 이 절 법당에는 그때의 문수동자 목각상이 봉안돼 있다. 청량선원 앞에 있는 고양이 상은 고양이가 세조의 목숨을 구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이 절에서 비로봉 쪽으로 40분 정도 돌계단을 올라가면 석가세존의 정골사리가 봉안된 적멸보궁이 나타난다.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는 적멸보궁의 발밑으..
삼랑진읍의 만어산 동쪽 8부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창건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고려 명종 11년(1181년) 동양보림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절 아래쪽에 많은 돌무덤이 있는데 만어석(萬漁石)이라고 불린다. 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이 고기떼를 거느리고 이곳에서 쉬어 갔는데, 그때 고기떼들이 이 돌들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 용왕의 아들은 큰 미륵돌로 변하여 지금도 이 절 미륵전 안에 안치돼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이 절에는 대웅전 삼신각 요사 객사 등이 있다. 절 마당에 있는 삼층석탑은 보물 466호로 지정돼 있다.
금오산 정상의 낭떠러지 아래에 있다. 신라시대 창건됐다고 전해진다. 의상대사의 득도로 인해 세운 사찰로 꼽힌다. 지리산 석불 3구 중 한 구가 법당에 봉안되었다고 전해진다.
1432년(세종 13) 윤회(尹淮)가 저술한 와 다산의 등의 기록에 의하면 839년(신라 46대 문성왕)에 무염(無染)화상이 창건하였으며 중요한 수도 도량으로 면모를 달리한 것은 1211년(고려 희종 7)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1163∼1245)가 크게 중창한 뒤부터이다. 고려말에는 강진지방이 세 차례나 왜구의 침입을 받아 이 절도 함께 폐허되나 조선 세종때 효령대군(孝寧大郡)의 보호를 받아 주지 행호(行乎)가 불타버린 가람을 복원하였다. 행호는 잦은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절 주위에 성을 쌓았는데 이 성을 행호토성(行乎土城)이라고 한다. 그 후 효종때 3차 중수를 하고 '원묘국사 중진탑(圓妙國師 中眞塔)'과 '백련사 사적비'를 세우게 된다.1208년(희종 4)에 천태종의 묘의(妙義)를 얻은..
전라도 지방에는 꽃무릇 군락지로 소문난 절이 세 군데 있는데 이름하여 전남 함평 용천사와 영광 불갑사 그리고 전북 고창 선운사이다. 백제 침류왕(384년)때 마라난타 존자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래하면서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불법도량이라는 뜻으로 불갑사((佛甲寺)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하나 구체적인 사료가 없어 확실하지는 않다. 불갑면 모악산(516m)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함평 용천사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어 두 사찰을 동시에 방문하는 것도 매우 좋을듯... 돌계단을 올라 처음 마주하는 천왕문 안에는 신라 진흥왕 때 연기조사가 목각했다는 사천왕상이 있다. 천왕문 우측에는 1층과 2층에 각각 종과 북이 걸린 육각누각이 있다. 보물 830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
국창 임방울 선생이 득음을 위하여 소리 연습을 했다는 만연폭포를 곁에 거느린 고려시대 사찰. 고려 희종 4년(1208년)에 만연선사가 세웠다고 하며 창건설화가 전해져 온다. 만연선사가 무등산 원효사에서 수도를 마치고 조계산 송광사로 돌아가는 도중에 이 곳에 이르러 잠시 쉬어가고자 앉은 사이 잠이 들었다. 꿈에 16나한이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역사를 하고 있었다. 잠을 깨 사방을 둘러보니 어느새 눈이 내려 주위에 쌓였는데 신기하게도 만연선사가 누운 자리에만 눈이 쌓이지 않고 눈이 녹아 김이 피어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만연선사는 그 길로 이곳에 토굴을 짓고 수도를 하다가 절을 세웠다. 이 절은 6.25 이전까지 대웅전 시왕전 나한전 승당 선당 동상실 서상실 동병실 서별실 수정료 송월료 등 3전 8방과 설루,..
무등산 서쪽 기슭의 등산로 어귀에 자리잡아 무등산을 대표하는 사찰. 신라 법흥왕 때 철감 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선종 11년(1094년)에 혜조국사가 고쳐짓고 조선 세종 25년(1443년) 전라도 관찰사였던 김오가 다시 고쳤다고 한다. 그 후 병화로 불에 타 버려 조선 광해군 원년(1609년)에 택경 수장 도광의 세 선사가 새로 지었다. 6.25 때 5백전과 사성전만 남기고 대웅전을 비롯 모든 건물이 불 타버렸다 지금의 대웅전은 1970년에 복원됐고 그 밖의 건물은 1976년에 다시 지어진 것들이다. 현재 현재의 사찰 건물은 대웅전 지장전 비로전 오백전 적묵당 행원당 범종각 일주문 등이다. 오백전(유형문화재 13호)은 조선 세종 때 지어진 것으로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됐다. 금부처를 중심으로 오..
우리나라 사찰중 석탑과 석불이 가장 많아 천불천탑의 전설이 전해져 오는 사찰. 운주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 권40 능성 불우조의 운주사 세주이다. "천불산에 있다. 절의 좌우 산마루에 석불, 석탑이 각각 일천씩 있고 또 석실이 있는데 이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 실제로 석불 석탑은 조각 수법이 투박해 고려 중기인 12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마도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두고 계속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영암 출신 도선이 우리나라 지형을 배로 보고 선복(船腹)에 해당하는 호남땅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배가 한쪽으로 기울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이곳에 천불천탑을 하루낮 하루밤 사이에 도력으로 조성하여 놓았다고 한다. 이 전설을 뒷받침이나 하듯이 ..
소양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10분쯤 호수를 달리면 오봉산(779m)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청평사가 나타난다. 고려 광종(973년)때 승현선사가 처음 세우고 문종 22년(1068년) 이두가 백암군원 옛 터에 군원을 세워 그의 아들 자현이 입산 수도를 했다고 한다. 그 후 조선 명종 5년(1550년)때 보우대사가 다시 세웠다고 전해진다. 국보급의 건물 여러 채가 있었으나 6.25 때 불타 없어지고 옛 건물로는 회전문(보물 164호)만이 남아 있다. 국내에 하나뿐인 것으로 윤회사상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밖에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연못이 있으며 3층 석탑이 남아 있다. 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아홉가지의 소리를 낸다는 구성폭포가 있고 맑은 물과 빼어난 주위 경관으로 유명한 청평사계곡이 펼쳐져 있다.
안면암은, 포교에 대한 원력을 바탕으로, 석지명 큰스님을 따르는 허공장회신도에 의해, 충남 태안군 안면읍 정당리 178-7번지에 건립된 수행과 전법을 위한 도량이다.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건축된 안면암은 법회시설로는 극락보전과 비로전, 나한전, 용왕각, 삼성각을 갖추고 있다. 내부시설로는 설립 초기부터 각 방에 해우소와 목욕시설 등 편의시설을 안배하였으며, 1층의 대형 홀은 다용도실로 다양한 법회활동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위생적인 대형 공양간을 갖추어서 참배객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www.anmyeonam.org
지리산의 북쪽 관문인 인월에서 심원, 달궁, 뱀사골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마천방면으로 가다보면 만수천(萬壽川)변에 호국사찰로 천년의 세월을 버티고 지내온 실상사가 나타난다.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 (828년)에 증각대사가 세운 절로 9산선종 중 가장 먼저 생긴 것이다. 정유재란때 완전히 폐허가 된 것을 조선 숙종26년(1700년)에 다시 지었으나, 고종 19년(1882년)에 거의 불타 버려 일부만 남았으며,현재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국보 제10호인 높이 약 5m의 백장암 3층석탑과 보물 10여점을 가지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광전(普光殿)을 비롯하여 약사전, 명부전, 칠성각, 선리수도원, 누각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극락전과 부속건물이 있고 사천왕문을 최근에 ..
운길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로 시원한 전경이 압권이다. 세조가 만년에 지병인 나병으로 오대산까지 갔다가 수로로 한강을 따라 환궁하는 도중에 양수리까지 왔을 때 운길산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내는 것을 듣고 수종사라는 절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수령이 55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버티고 서있어서 가을이면 노란 잎으로 더욱 아름다은 광경을 연출한다.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819m) 중턱 비탈의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고 있는 부석사는 신라의 의상대사가 중국 유학에서 돌아와 수도처로 삼아 안주하다가 뒷날 대가람을 이룬 곳으로 고건축물의 보고다. 천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규모를 잃지 않고 보존해 온 절 가운데서 그 창건 유래와 역대 고승들의 활약이 비교적 확실한 보기드문 절이다.신라 문무왕 16년(서기 676년)에 창건한 화엄종찰 부석사는 우리나라 목조건축물의 백미로 꼽히는 무량수전을 비롯해 국보5점, 보물4점, 도 유형문화재 2점 등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10대 사찰 중 하나이다. 무량수전은 봉정사 극락전과 수덕사 대웅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목조건물로 꼽히고 있다. 부석사는 비탈이 심한 곳에 있으나 모든 건물을 축대를 쌓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