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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Travel
남평 문씨 세거지 안에 있는 광거당은 영화 와 의 촬영장소로 유명하며, 대나무 숲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아담한 한옥은 매우 아름다운 건물이다. 또한 한국에서 가장 많은 고서를 보유하고 있는 문중문고인 인수문고(仁壽文庫)가 잇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은 원래 절이 있었던 명당 터를 남평문씨 일족이 세거< 世居 >를 위하여 정전법< 井田法 >에 따라 구획을 정리하여 터전과 도로를 반듯하게 열었고 집을 지었던 곳이다. 지금은 세거지에 아홉 채의 집과 정자 두 채가 있으며 주거지의 도로에 면한 부분에는 나지막한 담을 쌓았다. 수봉정사< 壽峰精舍 >는 이곳의 대표적인 건물로 새거터 전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찾아오는 손님을 맞기도 하고, 일족의 모임도 열던 큰 건물이며 정원의 꾸밈이 아름답다. 광거당< 廣居堂 >..
동헌은 조선시대에 지방장관인 고을의 원이나 감사, 병사, 수사 그밖의 수령들이 공무를 집행하던 집을 말한다. 이 동헌은 울산 도호부의 것으로서 숙종 7년(1681)에 부사 김수오가 창건한 것을 숙종 21년에 그의 아들 김호가 부사로 부임하여 일학헌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영조 39년(1763) 부사 홍익대가 중창하여 반학헌이라 개칭하였다. 그 후 한때 군청 회의실로 사용되어 내부 구조가 변형되었지만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겹처마의 익공집이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때 의병장이었던 낙포 이종문 현감이 조선선조37년(1604)에 세운 정자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전 이곳에 머문적이 있어 그후 이종문의 장자인 이지영에게 하목정이라는 정호를 써주었으며 또한 사가에서는 서까래위에 부연을 달지않은 것이 일반적이나 인조의 명으로 부연을 달았다고 한다.
남대문은 서울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태조 7년(1398) 창건 된 후 세종 30년(1448) 크게 개축되어 500년을 이어왔습니다. 도성의 남쪽에 있다하여 속칭 남대문이라 불리웁니다. 조선시대에 중국이나 일본의 사신들이 모두 이 문을 통과하여 서울로 입성하였습니다. 이 문은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중앙부에 홍예문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으며, 지붕은 우진각 지붕으로서 현존하는 우리나라 성문 건물로서는 최대규모입니다. 석축 윗면에는 주위에 높이 1.17m의 벽돌로 된 여장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을 열었고, 건물의 외주바닥에는 판석을 깔았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윗면은 중앙간만을 우물마루로..
이 건물은 탐라지< 耽羅誌 >에 의하면 세종 30년(1448)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창건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개건과 중수를 거쳤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그 수법으로 보아 17세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관덕< 觀德 >이란 '사자소이관성덕야< 射者所以觀盛德也 >'라 하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평소에 마을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쌓는다는 뜻이며 문무< 文武 >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함이었다. 건물은 이중기단< 二重基壇 > 위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이익공< 二翼工 >집으로 처마가 긴 것이 특징이었는데 1924년 일인< 日人 >들이 보수하면서 15자< 尺 > 정도나 나왔던 처마를 2자 이상 잘라 버렸다. 또한 1969년 대대적인 보수로 인하여 관덕정이 가지고 있던 제주도 특유의 맛..
고려 원종11년(1270) 2월 고려 조정이 몽고군과 강화를 맺고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맞서 고려 김방경과 몽고의 흔도가 이끄는 여몽연합군에 최후까지 항쟁하다 원종14년(1273) 김통정전원 순의한 삼별초의 마지막 보루이다. 총 길이 6km에 걸친 토성(높이 5m, 폭 3.4m)으로서 석성의 내성 800m 및 궁지, 관아 각종 방어시설을 갖춘 요새였다. 주요 유적으로는 고려고분, 살맞은 돌, 돌저귀, 장수물, 구시물, 옹성물, 연못지 등이 있다. '76년 9월 9일 제주도 기념물로 지정된 이듬해인 '77년 이후 현재까지 10억여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토성 1km를 복원하고, 순의비·순의문·항몽유적기록화(7폭)·관리사무소 등을 시설하여 국난극복의 교육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항파두리토성은 고려 원..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이 성은 1991.2.21 사적 제346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의 남문인 진무루에서 무장초등학교 뒷산을 거쳐, 해리면으로 가는 도로의 좌편까지 뻗어 있는데 성의 둘레는 약 1,400m,넓이는 43,847평 이다. 성내에는 객사,동헌,진무루 등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고 건물 주변에는 여러가지 유구들이 산재해 있다. 그동안 흙으로만 축조된 토성으로 알려져 왔던 이 성이 공사때에 성벽 동쪽 끝부분의 단면이 드러 났었는데 성곽일부가 흙과 돌을 섞어서 축조된 것임이 밝혀졌다. 1915년에 발견된 「무장읍지」에 의하면 조선 태종 17년(1417)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0,000여명을 동원하여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만4개월 동안에 축조했다고 전한다.한편 1894년..
전북 고창일대에는 고인돌이 무척 많다. 고창읍에서 선운사 방면으로 가다 죽림리로 들어서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야산 기슭에 고인돌이 흩어져있다. 이곳의 고인돌은 북방식, 남방식, 개석식이 고루 섞여 있어 "고인돌박물관"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선사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1990년 현지조사로 447기가 발견되었고 파괴 매몰된 108기 까지 555여 기가 확인되어 세계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지역이다. 숫자의 방대함과 더불어 여러 가지 형태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어 동북아시아의 고인돌 변천사를 규명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인류최초의 문화유산이다. 2000년 11월 29일,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정식 등록되었다. www.gochang.go.kr/dolmen
신라시대의 천문을 관측하던 대(臺). 높이 약 9.5m. 위치는 옛날에는 경주부(慶州府) 남쪽 월남리(月南里)라고 하였던 곳이며, 계림(鷄林)의 북방 150-200m, 내물왕릉 동북방향 약 300m 되는 곳이다. 이 근방을 속칭 '비두골', '비두거리'라고도 하는데 이는 북두칠성에 다른 별을 비교해서 국가의 안위와 길흉화복을 점쳤다는 뜻이다. 첨성대는 신라 제 27대 선덕여왕(632-647) 때에 만들어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대로 알려져 있으며 신라인의 슬기와 예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체적인 외형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화강석의 2중 기단(基壇) 위에 27단의 석단(石段)을 원통형(圓筒形)의 곡선으로 쌓아 올렸으며 맨 위에는 장대석(長臺石)을 정자형(井字形)으로 얹어..
나주시 고려 성종 12년(993) 목(牧)이 설치된 이래 조선시대까지 전남지방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그 지위를 누려왔다. 나주목사내아는 조선시대 나주목사의 관저이기 때문에 상류주택의 안채아 같은 평면구조로 이루어졌다. 안채는 순조 25년(1825) 건립 되었으며 건물구조는 전통양식 한옥으로 ㄷ자형이다. 특히 안채는 시내중심권에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 많이 남아있어 당시 관청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전국의 대표적 지역이다. 목사내아의 처음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본체 상량문에 1825(순조25)에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문간채는 1892년에 건립하였다. 이 집의 명칭은 홍재응목사(1860 - 1862)가 금학헌(琴鶴軒)에서 죽었다는 읍지의 기록으로 보아 내아의 명칭이 금학헌 이었음을 알 수..
미륵사지에 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으로 미륵사지 서원(西院)에 자리하고 있으며 국내에 남아 전하던 석탑으로는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탑이다. 높이 14.24m.전면이 거의 도괴(倒壞)되어 동북면 한 귀퉁이의 6층 지붕틀까지만 남아 있으나 본래는 평면 방형탑(平面方形塔)으로서 6층 이상의 탑신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여 한때 7층설과 9층설 등이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1992년 동탑지 주변 발굴에서 노반석(盧盤石)이 발견되어 동탑과 더불어 9층이었음이 밝혀졌다.일제시대에 미륵사지를 조사한 일본인들이 이 탑의 동쪽에 같은 규모의 목탑(木塔)이 있었다고 하였지만 최초 발굴조사를 통해 동쪽의 탑도 서쪽과 같은 석탑이었음이 밝혀진 바 있다.이 석탑은 그 이전에 성행하였던 목조탑의 양식을 나무대신 돌로써 그 구조를 ..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왕금마을 뒷산 구릉지대를 지역주민들은 '모질메'라고 불러 왔다. 이곳은 예로부터 마한 혹은 백제의 궁궐자리로 알려진 곳이다. 위치는 금마산에서 남으로 약 3㎞쯤 떨어져 얕으막하게 전주행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는 대지이다. 이 성은 구릉지를 일부 깍아내리고 주변을 흙으로 쌓아올려 세 단으로 나누어 평지를 조성하여 그 안에 건물을 배치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명 모지밀산성, 왕궁평성, 왕궁리토성이라고도 불린다. 이 성은 1976년 원광대학교 마한 · 백제문화연구소에서 1차 발굴후 1989년부터 부여 문화재 연구소에서 발굴조사에 착수한 이래 그 동안 확인된 유구는 남북 500여m, 동서 236m(폭 3m)의 장방형 성임이 밝혀졌다. 성벽은 일반적인 담장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큰 폭이 약..
이 성은 삼국시대에 토성< 土城 >으로 축조< 築造 >되었던 것을 조선시대에 현감< 縣監 > 이담룡< 李聃龍 >이 석축으로 축성하였다. 원래 이 읍성은 둘레가 약 1,000m, 높이가 4m나 되었고, 성내에 4개의 우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성을 쌓았던 큰 돌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성은 중국식 방형축성법< 方形築城法 >으로 전국의 중요한 읍성이 개축되던 14∼15세기의 규식화된 축조방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나타나는 축성법 변천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광성보는 조선 효종 9년(1658)에 설치되었고, 숙종 5년(1679)에 용두< 龍頭 >, 오두< 鰲頭 >, 화도< 花島 >, 광성< 廣城 > 등 소속 돈대< 墩臺 >가 축조되었다. 영조 21년(1745) 성을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하고 안해루< 按海樓 >라 하였다.고종 3년(1866) 프랑스의 극동함대와 공방전이 있었고(병인양요), 고종 8년(1871) 미국의 아세아 함대와 이 성을 유린하여 백병전이 벌어졌을 때(신미양요) 어재연 장군 휘하 전 수비군이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순국한 곳이다.광성보의 경역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 雙忠碑 >와 신미순의총< 辛未殉義塚 > 및 1977년 전적지를 보수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보수정화비 등이 건립되었다.
도산서원은 한국 유학사의 큰 별이며 해동주자(海東朱子)라 불리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이 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예부터 선비들이 한번쯤 찾아 보기를 소원하던 곳이며, 지금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조선 선조(宣祖)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림들이 상덕사(尙德祠)(보물 제211호)란 사묘(祠廟)를 지어 그를 향사(享祀)하였고 전교당(典敎堂)(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하였으며,선조 8년 사액(賜額)을 받음으로써 영남유학의 총본산이 되었다.안동지방에는 유달리 서원이 많다. 하회 류씨에 의해 서애 유성룡 선생과 아들 류진을 모시는 병산서원,의성 김씨의 사빈 서원, 안동 권씨의 도계서원, 배향문제로 시비가 일었던 호계서원, 고산..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퇴계< 退溪 > 이황< 李滉 >(1501∼1570) 선생의 종택이다. 원래의 건물은 없어졌으나 1929년에 선생의 13대 사손< 嗣孫 > 하정공< 霞汀公 >이 사림< 士林 > 및 중종< 中宗 >의 협조로 옛 종택의 규모를 참작하여 지금의 터에 새로 지었다. 종택의 우측에는 추월한수정< 秋月寒水亭 >이라는 정자가 있다. 종택은 정면 6칸 측면 5칸의 ㅁ자형으로 높은 석축< 石築 > 위에 둥근기둥과 네모기둥을 혼용하여 지었으며 전면< 前面 >에 솟을대문을 갖추었다. 추월한수정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도산서원 - 퇴계 이황이 서당을 짓고 유생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
이조 숙종대에 윤< 尹 > 증< 拯 > 선생< 先生 >이 지었다고 전하나 그 세부기법으로 미루어 19세기 중엽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노성산성이 있는 이산< 尼山 >의 산자락에 기대어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하여 놓여 있다. ㄷ자형< 字形 >의 안채가 날개를 펴서 뒤에 배치되었는데 그 앞을 막아 중문간의 출입에 방해가 안되도록 비끼면서 동쪽으로 축을 옮겨 가로로 배치되었다. 사랑채 앞은 행랑채 없이 전면이 개방되며 안채 축의 정면에 정갈한 조선식< 朝鮮式 > 우물이 축조되었고 그 남서쪽에는 역시 조그만 연못이 조성되었다. 안채 동북쪽 모서리에는 사당채가 있는 데 근래에 다시 복원 한 것이며 사당 주위로 담을 둘러서 공간을 따로 구획하고 있다. 안채의 평면구성은 대체적으로 중부방식을 좇으면서도 남도풍..
조선초기의 석축읍성으로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고창지역이 백제때 모량부리(牟陽夫里)로 불리웠던데서 연유한 듯 하다. 고창읍성은 평지와 산 기슭을 감싸면서 축조한 산성과 평지성의 절충식 평산성(折衝式, 平山城)이다. 현재, 성의 둘레는 1,680m(치성을 포함하면 길이 1,725m)이며 외성(外城)이 없는 이성의 해자(垓字) 길이는 약 3㎞에 이르고 있다. 성의 높이는 4m 내외인데 읍성에 관한 여러 기록들에는 12척(尺)으로 표기되어 있다. 성의 넓이는 50,172평이며, 성문은 정문인 북문과 동문, 서문이 있고 각문에는 문루(門樓)가 세워져 있으며 각 성문 밖에는 편문식(偏門式) 반원형 옹성(甕城)이 부설되어 있다. 또한 치성이 동 · 서 · 남 · 북 · 동남 · 서북 등 6개소에 설치..
이 석불들은 암반에 새긴 삼존불< 三尊佛 >과 그 앞 모난돌 4면에 각각 불상을 새기어 모두 칠불< 七佛 >이 마련되어 있어 칠불암마애석불< 七佛庵磨崖石佛 >로 불리어 오고 있다. 삼존불의 가운데 있는 본존불은 앉아 있는 모습으로 손은 항마인< 降魔印 >을 하고 있어 석굴암의 본존불과 같은 자세이며 불상의 높이가 2.7m에 이른다. 또한 4면에 새긴 4면불< 四面佛 >도 모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각기 방향에 따라 손의 모양을 달리하고 있다. 이와 같이 깊은 산 속에 대작의 불상을 조성한 것도 놀라운 일이나 조각수법 또한 웅대하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경주남산 - 흥망성쇠의 유서 깊은 역사의 경주남산경주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 절벽 꼭대기에 새겨져 있어 마치 구름 위에 ..
이 불상은 칠불암< 七佛庵 > 위에 곧바로 선 절벽 꼭대기에 새겨져 있어 마치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듯이 보이는데 머리에 삼면보관< 三面寶冠 >을 쓰고 있어 보살상< 菩薩像 >임을 알 수 있다. 옷자락으로 덮여 있는 의자 위에 걸터앉아 한 손에 꽃을 들고 한 손은 설법인을 표시하고,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은 마치 구름 위의 세계에서 중생을 굽어보고 있음을 느끼게 하고 있다. 두광< 頭光 >과 신광< 身光 >을 갖춘 광배자체를 감실< 龕室 >로 표현했기 때문에 보살상이 매우 두드러져 보인다. 불상 높이는 1.4m이며,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인다. 경주남산 칠불암 마애석불 - 깊은 산 속에 대작의 불상을 조성한 것과 조각수법이 웅대...경주남산 - 흥망성쇠의 유서 깊은 역사의 경주남산
이 불상은 절벽의 쑥 내민 바위면을 깎아 부조< 浮彫 >로 새긴 것으로 광배< 光背 >와 대좌< 臺座 >를 모두 갖춘 고려시대< 高麗時代 >의 거대한 보살상< 菩薩像 >이다. 얼굴은 비교적 풍만하면서도 부피감이 있지만 가는 눈, 작은 입 등에서 신라보살상< 新羅菩薩像 >보다는 다소 진전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신체는 허리를 약간 비튼 유연한 자세라든가 어깨나 팔의 부드러운 굴곡 등 얼굴에 어울리는 형태미를 묘사하고 있어서 이 상< 像 >이 상당한 수준의 조각가에 의하여 조성된 작품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천의< 天衣 > 자락을 잡은 오른손이나, 손바닥을 펼쳐 보이는 지나치게 큼직한 왼손의 형태, 둔중한 두 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옷의 경직된 U형 옷주름 등에서 역시 고려조각의 특징을 엿볼 수 있..
명종 22년(1567년) 서애 유성룡의 맏형인 겸암 류운룡 선생이 지은 건물이다. 겸암은 이 곳에서 도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부용대 상류의 언덕에 있다. 이 건물은 강줄기가 마을에서 가장 멀리 휘도는 높은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많이 떨어진 곳으로 지금도 가기 힘든 외진 곳에 속한다. 건물 구조는 2층 누각식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중층 누각식의 누 마루를 둔 5양(梁)집이며 장대로 마감한 높은 축대 위에 세워졌다. 일자형 평면이며 길이가 4칸에 너비가 2칸이고 큰 방은 2칸으로 서편에 있다. 안채는 동단에서 꺾인 ㄱ자형집이며 길이가 6칸이고 너비가 4칸 크기이다. 현판 글씨는 퇴계 선생의 친필이다.
서애 류성룡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우고자 하였으나 재력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승(僧) 탄흥이 10년동안 시주를 거두어 선조 19년 (1586)에 완공하였다. 임진왜란 후 은퇴한 선생께서 이곳에서 징비록을 구상,저술하였다. 이곳은 넗은 대(臺)를 이루며 여러채의 집을 지어 앞서 지었던 원지정사나 빈연정사와는 그 큰 규모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는다. 동쪽 6칸은 일자대문채를 두었고, 바로 일자형 안채를 동향해서 앉혔다. 안채는 부엌은 한가운데에 두고 그 양편에 방을 두었다. 이지역에 전래하는 민가의 한 기본형인 도투마리집과 규모를 같이 하는점이 주목된다. 구성을 보면 대문, 안채, 사랑채 그리고 별당을 둔 격이 되었으므로 여염 대가집의 배치를 재현한것이다. 사랑채는..
문충공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며 남촌을 대표하는 곳이다. 문충공이 삼칸 초옥인 농환재에서 별세한 뒤 청백하게 산 선생의 유덕을 기리는 수많은 유림들의 도움을 받아 장손인 졸재 원지공이 처음 창건하였고 그들 아들에 의하공이 확장 중수한 조선중엽의 전형적인 사대부집이다. 충호당 전서체 현판은 조선 중기의 명필 우의정 미수 허 목의 친필이다. 충효당이란 당호는 서애의 증손자인 익찬 벼슬을 역임한 우눌재 류의하대에서 게판되었으며 기문은 식산 이만부에게 청해 완성한 것이다. 모두 52칸이 남아있다. 남북이 조금 길고 동서가 그 4/5정도가 되는 사각형 터전에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행랑채가 전면에 독립되어 있고 사랑채가 안채의 앞쪽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독자성을 지닌다. 그런 까닭..
하회마을에는 처음 정착한 허씨 때부터 성황신을 받드는 상당(화산 중턱)과 하당(국신당, 화산자락) 그리고 삼신당(마을 중심에 있는 고목인 느티나무)이 있었다. 이들 세 곳의 당에는 정월 보름날마다 정기적으로 동제를 모셔 오고 있고 700여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그 전통은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별신굿은 무당이 주관하는 무속의 일종인데, 양반이나 선비들은 원래 무속을 배척해 왔기 때문에 풍산 류씨들은 별신굿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행사에도 직접적인 관여를 하지 않았다. 동제의 주관자를 산주(山主)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산주는 풍산 류씨들이 맡지 않고 있다. 하회마을에 사는 서민들은 양반으로부터 소외당한 한을 별신굿을 통해 토로해 왔다. 아울러 별신굿에서는 일종의 세태풍자도 있었던 것 같다. 별신..
풍산류씨의 대종택 입향시조인 전서공(典書公 柳從惠, 겸암의 6대조)이 처음 자리잡은 곳이다. 입향 당시 처음 지은 건물이 아직 사랑대청 건물로 남아있는 유서깊은 건물이다. 13세기말에 지어졌다고 하니 하회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제일먼저 터를 잡은 건물이자 종택답게 명당을 차지하여 하회에서 보기 드물게 정남향(癸坐丁向)을 취하고 있다. 1500여평의 대지 위에 대종택다운 위치와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조선조 영남 사림의 대표적인 건물로 손꼽힌다. 사랑채 정면의 입암고택(立巖古宅)이란 현판의 입암은 겸암공의 부친 입암 류중영(立巖 柳仲영)을 일컬으며 양진당(養眞堂)이란 당호는 겸암공 6대손인 류영(柳泳, 1687∼1761)의 호이며 현판은 근세사람 최동진(崔東鎭)의 자필이다. 99칸으로 전해오지..
병산서원은 1613년(광해3년)에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 조선중기 문신으로 류성룡의 문하)등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현 위치에 존덕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곳이다.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고려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풍산 류씨의 교육기관이었는데 1572년(선조 5년)에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겼다. 1610년에는 풍악서당을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662년(현종3년)에 서애의 세째아들 수암 류진(修巖 柳袗, 1582~1635)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863년(철종 14년) '녕산'이란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1868년 대원군 선원 철..
강진만이 한 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萬德山, 408m)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선생이 강진 유배 18년중 1808년 봄부터 1817년까지 10여년간 거처하면서 연구한 다산학 산실이 되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그는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불후의 명서(名書)들과 함께 후학을 가르치며 스승으로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학이 머물던 곳이다. 이곳에서 24년이나 연하인 추사와 초의와도 교유(交遊)를 맺어 마주 앉으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강론을 벌였다 한다. 시원스런 대나무 숲을 뚫고 오솔길을 오르면 정면 3칸, 측면 1칸인 팔작기와를 인 다산초당이 시야에 들어오고, 왼쪽엔 서암(西庵) '다성각(茶星閣)'이, 오른쪽엔 '보정산방(寶丁山..
예천군의 젖줄인 내성천변에 있는 정자를 가리킨다. 1653년 퇴계 이황의 종손이자 문하생인 우암 이열도가 세운 것으로 알려진다. 선몽대(仙夢臺)라는 현판은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퇴계,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김상헌, 이덕형 등 당대 석학들의 친필시도 걸려있어 그 시절의 풍류를 전해준다. 정자는 노송에 감싸여 있다. 이 곳에 서면 발아래로 강물이 도도히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 건너편 강가에서 정자를 바라보면 자연을 노래하던 시인묵객들의 도포자락이 얼핏얼핏 내비치는 듯도 하다.
초간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을 저술한 초간 권문해가 세우고 심신을 수양하던 곳이다. 선조 15년(1582)에 초건된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 4년(1636)에 다시 불타는 등 수난을 거듭했는데, 지금의 건물은 초간 선생의 현손이 중창한 것으로 기암괴석과 주변의 경관이 조화를 이루어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초간 권문해(1534∼1591)는 명종 15년(1560)에 급제한 후 대구부사 등 내·외직을 거쳐 좌부승지로 지냈으며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류인 대동운부군옥 20권을 저술하여 국사연구의 귀중한 자료를 남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