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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국내여행지/산성 (104)
국내여행 Travel
금성산성은 해발 603m되는 산성산을 주봉으로 하고 연대봉·노적봉·철마봉 등 봉우리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다. 산성의 전체 길이는 약 5km에 달하며 행정구역은 북쪽과 동쪽은 전북 순창군 팡덕면 청계리에 연접되고 남쪽으로는 담양 금성면 금성리, 서쪽은 담양호가 연결되고 있다. 금성산성에는 동서남북 방향에 각각 외성문이 있다. 먼저 남문을 보면 본성인 체성에 있는데 남문의 200여m 아래에 외성과 외성문이 있다. 퇴락이 심하여 그 형체를 파악하기 힘드나 외성문에서 삼각형으로 연결되어 주성벽에 닿는 부분에 있다. 동문은 남문에서 보아 우측인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고 있으며 축태 모양의 평탄하고 넓은 단을 쌓고 그 사이에 빗장걸이가 있어 성문의 문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덕주산성은 신라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가 피난하였던 곳이라고 전해 오는데 월악산의 산마루와 그 지맥을 둘러싸고 내성과 외성을 갖춘 나성(羅城, 외성)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곳은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 요새지이기 때문에 이 성은 차단성(遮斷城)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대개 성벽은 화강암 자연석을 약간 다듬어 사용하였는데 현재 유구는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과 북문, 동문 등이 남아 있다. 덕주산성은 현재 4개의 곽(郭)을 두르고 있는 것으로서 이러한 산성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더구나 이 산성은 그 규모에 있어서 충청, 전라지역인 양호(兩湖, 호서와 호남) 지역을 통틀어 최대 규모의 산성이다. 4개의 성벽은 각기 가장 상류인 상덕주사터를 포용한 계곡을 막은 상성(上城)..
이 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숙종29년 (1703)에 국방에 대한 새로운 인식 속에서 해상을 방어할 목적 으로 축성된 것이다. 성은 내·외성으로 이루어졌고 성벽은 자연석으로 쌓았지만 중요한 부분은 가공한 무사석< 武砂石 >으로 쌓았으며, 성의 길이는 17,337m 이고 높이는 1.5 ∼3m 정도이며 면적은 약 8.213㎢ 에 달하는 거대한 성이다. 처음에 산성을 쌓은 것은 확실치 않으나 효종 6년(1655)에 동래부사 임의백이 이 산성을 다시 쌓고 부치< 府治 >를 옮기자는 건의를 한 바 있으며, 또 현종 8년(1667)에 통제사 이기형이 성터가 남아 있었다는 기록을 한 것으로 보아 이미 산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숙종 28년 (1702) 에 이르러서야 경상감사 조태동의 건..
호점산은 회북면의 남대문리, 용곡리, 거교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호점산성은 산봉우리와 계곡을 감싼 형상이다. 대부분 돌을 쌓아올렸으나 경사가 가파른 서남쪽 일부 구간은 흙과 돌을 함께 쓴 것이 특징이다. 축성 시기는 삼국시대로 추정된다.
청주에서 보은으로 넘어가는 피반대령에 올라서서 개울물을 따라 내려가면 회인이 나온다. 회인의 매곡산에는 돌을 쌓아올린 아미산성이 있다. 거친 풍상에 훼손돼 형태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곳곳에 남아있는 흔적들은 지역 방위에 한 몫 했을 아미산성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매곡산에 있다해서 매곡산성이라 불리기도 한다.
주성산성은 주성산 정상의 봉우리와 능선을 둘러싸고 있는 석성이다. 산성은 창리에서 2km 남짓 떨어져 있는데 관련 문헌이 없어 원래 이름과 축성시기 등을 알 수가 없다. 인근주민들도 '성재'라고 부를 뿐이다. 이 성은 보은과 청주를 연결하는 길목을 살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피반대령과 물길을 막아버리면 산성 아래를 통과하지 않고는 다른 길이 없었기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노고산성은 내북면 산성리 잣미산에 있었다. 축조시기는 삼국시대로 추정된다. 마을사람들을 통해 구전돼온 내용에 따르면 노고산성은 백제에서 쌓은 것으로 5km 정도 떨어진 삼년산성에 주둔했던 신라군과 대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북쪽을 강화한 형태나 성안에서 출토된 유물로 미뤄 신라에서 쌓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노고산성은 적과의 교전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주변 산세가 험난해 적의 공격이 쉽지 않은데다 청주와 보은의 길목을 차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자모산성은 축조와 관련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축성시기는 알 수 없다. 일부 발견된 석축과 출토유물들로 미뤄 고려시대로 추정할 뿐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성의 규모는 길이가 451m, 높이가 2.7m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았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당시 전황으로 미뤄 성을 쌓은 것이 아니라 성을 빼앗아 잠시 머물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성에서는 병자호란 때에도 치열한 전투가 벌여졌다고 전해진다. 병마사 유림과 관찰사 홍명구가 적을 맞아 싸웠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만산리 자산 꼭대기 부분에 있는 토성을 자산산성이라 부른다. 지금은 200여m의 흔적과 돌무더기 정도가 확인될 뿐이지만 상주성의 외성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교통요지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상주지역은 영역 다툼이 잦았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였으며 후삼국시대에도 후백제와 고려의 접전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어서 자산산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용산산성은 용성면에 있는 용산의 능선을 따라 이어진다. 2중 구조로 돼 있는 것이 이 성의 특징. 내성은 동서폭이 240m에 남북폭이 30m 남짓 된다. 서쪽과 남쪽에 직선형태의 벽을 쌓았고 나머지 부분은 경사면을 따라 곡선으로 연결한 형태다. 성문은 남쪽을 제외한 세곳에 만들었다. 외성은 동쪽 방향을 중심으로 석축을 한바퀴 더 돌려놓은 모양이다. 축성과 관련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2중 구조로 미뤄 삼국시대 후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삼국시대 초기 유물인 적색토기 등이 현장에서 발굴돼 삼국시대 초기에 쌓았던 성을 후기에 보강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가야시대에 도적을 물리치기 위해 이 곳에서 군사훈련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압량면 압량리, 내리 진량면 선화리 등 3곳에 소규모의 토성이 남아있다. 토성의 형태는 타원형이며 윗면이 평탄하게 정리돼 있는 것이 이 지역 토성의 특징이다. 이들 토성은 방어목적으로 쌓은 것이 아니라 군사훈련장을 만들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신라 김유신 장군이 압량부(현재의 경산시)의 군주로 있으면서 선덕여왕의 명에 따라 만들었다는 것이다. 모집한 의병을 훈련시켜 삼국통일을 위한 전투에 투입했다고 한다. 이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압량리 토성으로 폭이 90m정도다. 선화리 것이 가장 작아 폭이 14m에 불과하다. 이 토성들은 1971년 사적 제 218호로 지정됐다.
속문산성은 김천시 가문면 문무리와 송북리 사이에 자리잡은 백운산(白雲山)에 있다. 백운산(해발 618m)이라는 이름은 정상 부분이 흰구름에 가려있어서 붙여졌다. 옛날에는 속문산(俗門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속문산성은 해발 400m의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다. 삼국시대 초기에 축성됐다고 전해진다. 산의 북쪽만 큰 바위를 쌓아올린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 나머지 부분은 무너져 버린 상태다. 이 지역은 신라의 영토였으나 백제에게 빼앗겼다 찾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백운산 옆의 고소산(姑蘇山)에도 성터가 남아있는데 주민들은 속문산성을 숫성, 고소산성을 암성으로 부른다.
서형산은 경주시내의 서쪽에 있다. 해발 380m의 아담한 이 산은 선도산(仙桃山)으로도 불린다. 서형산성은 서라벌의 서쪽 방어를 맡았던 산성으로 산의 8부 능선을 따라 축성돼 있다. 성의 둘레는 2.9km 정도다. 돌을 쌓은 석성이었으나 지금은 군데군데 돌무더기가 남아있을 뿐이다. 축성시기는 신라 24대 진평왕 13년(593)으로 전해진다. 30대 문무왕 13년(673)에 증축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상주읍성은 축성과 훼손을 거듭 겪은 비운의 성이다. 낙양, 무양, 남성, 서성 일대를 원형으로 연결하는 상주읍성을 언제 어떤 목적으로 축성한 것인지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상산지'에 "석축 둘레는 1549척이고 높이는 9척이며 성내에는 21개의 샘과 1개의 연못이 있다"고 기록돼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뿐이다.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정기룡 장군이 왜적을 격퇴한 곳으로 알려진다. 임진왜란을 겪은후 허물어졌다가 여러차례 보수공사를 거쳐 어느정도 복원됐으나 일제시대에 다시 철거돼 옛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다.
산내성은 가흥동 뒷산에 있는 토성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장에서 신라시대 기와조각이 출토된 점으로 미뤄 그 즈음에 축성됐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확인된 성의 둘레는 250m 정도이며 토성의 높이는 2m 내외다. 지금도 성의 일부가 남아있다. 산내성은 외적침입에 대비한 방어용인 동시에 봉수성의 역할도 했다고 전해진다. 기록에 따르면 풍기 전망산의 봉수성에 연락한 것으로 돼있다. 성안에는 군창지로 쓰인 듯한 터와 분묘 10여기가 있다.
순흥읍 읍내리 뒷산에 위치한 비봉산성의 요즘 모습은 우리 가요 '황성옛터'에 묘사된 것과 비슷하다. 성이 허물어져 옛 모습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이 만들어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학자들은 삼국시대부터 성의 필요성이 대두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석축 부분은 일부 남아 있지만 토축부분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다. 성안에 있었다는 우물 2개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북형산성은 경주시내에서 7번 국도를 따라가다 포항 약간 못가서 보게 되는 북형산(해발 265m)에 있다. 산성은 급한 경사면을 머리띠처럼 둘러싸고 있다. 성의 둘레는 750m 가량으로 토석성(土石城)이다. 산성 자리에서 사방을 돌아보면 걸릴 것 없이 시야가 시원하게 트인다. 포항까지 한눈에 들어와 외적의 침범사실과 동태를 파악하기에 용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산성은 신라 30대 문무왕 13년(673)에 쌓은 것이다. 현재까지 건물자리 2곳과 성문터 2곳이 확인됐다. 연못터와 조선시대 사용됐을 것으로 보이는 봉수대도 남아있다.
김천시 부항면 어전리 서쪽에 있는 해발 700m의 산에는 백두대간 종주코스로 이름난 부항령이 있다. 부항령성은 해발 600m쯤의 능선에 있다. 큰 돌을 쌓아올린 높이가 3m 가량이지만 대부분 무너져버리고 40m가량만 예전의 형태를 보전하고 있다. 성벽에는 밖으로 화살을 쏘던 구멍이 군데군데 나 있기도 하다. 성 안에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면 던지기 위해 쌓아둔 돌더미가 남아있다.
미산산성은 남산면과 용성면을 나누는 경계지역의 구릉에 있었다. 성의 규모가 작아 둘레가 400m에 불과하다. 돌담과 흙담을 혼합한 토석혼축 형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대부분 무너져 버리고 토벽 일부만 남아있다. 성과 관련한 기록이 없는데다 발굴조사에서도 별다른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축성시기와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조선 효종조에 축조돼 고종조에 없어진 관란서원터가 성안에 있다.
등강산성은 풍기읍 백리마을의 뒷산에 있으며 둘레가 240m 정도인 자그마한 성이다. 그러나 이 작은 성에서 후백제의 최후가 결정됐다. 남쪽 정벌에 나선 고려 태조가 이 곳에서 칠일을 머물면서 후백제로부터 항복서를 받았던 것이다. 성의 이름도 이 때 붙여졌다고 한다. 아쉽게도 지금은 성곽 전체가 허물어져버려 형태조차 파악하기 힘들 지경이다.
이름도 아름다운 '달밭성'은 삼가리의 달밭골에 있는 석성이다. 학자들은 삼국통일기에 축성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성의 둘레는 531m이지만 현재 석축이 남아있는 부분은 동쪽 경사면의 30여m 뿐이다. 신라가 통일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력을 키우던 연병장이 달밭골 동남쪽에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남산고성은 공검면 역곡리에 있는 토성이다. 성의 높이는 1~1.5m이며 둘레는 200m 정도다. 축성시기는 미상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이 곳에 방어진을 치고 왜군과 대적했다고 전해지는 걸로 미뤄 그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근암성은 산양면 현리 뒷산에 있다. 삼국사기에 성의 위치가 정확히 기록돼 있어 삼국시대 또는 그 이전에 축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은 신라 경애왕 4년(927)에 견훤과 왕건이 접전을 벌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성터만 남아있으나 영웅호걸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듯하다.
구성산성은 산의 형태가 거북이 모양을 닮은 구성공원에 있다. 성곽은 무너져 버렸지만 돌을 쌓은 흔적이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구성산성은 성이 들어서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성안에 우물과 전답이 있어 유사시에 식량 걱정을 덜 수 있으며 하천이 성 아래로 흘러 외적의 침입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임진왜란때에는 성 자체가 무덤이라 할만큼 격전이 벌어졌다고 전해진다. 축성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경상도지리지'에 조선 태조 2년인 1393년에 시축(始築)된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축조양식과 정황으로 봐서는 훨씬 이전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삼국시대에는 이 지역이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지역이어서 방어를 위한 성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도 홍건적과 왜군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만들었을 ..
충남 논산시 연산면 표정리 산20 이 산성은 흙과 돌로 자연< 自然 >의 지세< 地勢 >를 이용하여 험준< 險峻 >한 상봉< 上峰 >에 만들었다. 웅진시대< 熊津時代 >로부터 사비시대< 泗 時代 >에 걸쳐 축성된 백제< 百濟 > 때의 것으로 여겨지며 자연석을 이용하여 작은모 쌓기를 한 것이 특징이다. 둘레는 870m이고 성안에서 '황산인방< 黃山寅方 >' '대안< 大安 >'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된 바 있으며 백제 특유의 삼족토기< 三足土器 >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발견된다. 주변의 고분군< 古墳群 >과 함께 백제< 百濟 > 말< 末 >의 황산벌 싸움과도 관계 깊었던 산성< 山城 >으로 보여지고, 조선< 朝鮮 > 초기< 初期 >까지도 군창< 軍倉 >을 두어 유지했던 기록이 있다. 북서쪽의 노성산성< 魯城山..
충남 서천군 장항읍 장암리 산1-1외 20필 장암진성은 해발 90.1m의 후망산 남서쪽에 길게 드리워진 말미에 만들어진 것으로 산성이라기 보다는 평지성에 가깝다. 성벽은 해발 4∼43m 사이의 산 구릉과 해수면에 임해 석축으로 만들어졌다. 성벽의 둘레는 640m로 전제형태는 동서 190m, 남북 100m로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로 남벽과 북벽에 각각 1개소의 문지가 있다. 현재는 성내에 민가가 자리하고 있으며, 서벽은 일제시대에 석축을 헐어 장항제련소 공장부지를 조성하는데 사용되어 형태가 잘 남아 있지 않다. 성의 서벽과 서쪽 전방에 위치한 전망산 사이에는 본래 해수가 들고나는 지역으로 천연의 자연해자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매립되어 현재 공자부지와 전답으로 이용되고 있다. 전망산에 오르면 금강하구..
충남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 산22-1외 4필 이 성은 편축식으로 되어 있으며, 가로 세로 30∼40㎝ 크기의 자연석을 방형, 장방형으로 치석하여 쌓은 것을 현재 잔존하는 남.북벽의 중간 지점에서 3∼4단의 석축렬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벽의 붕괴지점에서는 축성시 밑에 깔린 삼국기 토기편과 기와편을 볼 수 있고, 이를 통해 본 성쌓기는 관축에 의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성벽의 유물로 보아 삼국시대에도 이미 이곳이 주거지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산성을 이 중간성으로 보고 상부는 토성이며, 하부는 석축산성이라고 하며, 삼국시대의 와편 및 토기편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하며, 서해안의 움직임 및 금강입구를 감사할 수 있는 요충지로 평가하고 있다. 이 남산성은 우리고장의 남산놀이가 전해오고 있으..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산3 이 산성은 해발< 海拔 > 170m의 건지산 정상부를 에워싼 말안장 모양의 토축< 土築 > 내곽< 內廓 >과, 그 서북쪽 경사면의 계곡을 두른 외곽< 外廓 >의 이중성벽< 二重城壁 >으로 된 큰 규모의 산성이다. 내곽은 둘레 약 350m의 작은 것이나, 외곽은 둘레가 약 1300m나 된다. 이처럼 산정식산성< 山頂式山城 >과 포곡식산성< 包谷式山城 >이 결합된 이중구조의 산성은 특히 백제< 百濟 > 후기< 後期 >에 나타난 새로운 산성의 형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산성의 동쪽과 서쪽의 낮은 연봉 위에는 규모가 작은 보루< 堡壘 >가 딸려 있어서 백제의 축성기술을 살피는 데 좋은 예로 꼽혀온다. 성 안에는 봉서사< 鳳棲寺 >란 작은 사찰이 있고, 성 안으로 통하는 동·서의 ..
경남 고성군 거류면 거산리 거류산성은 신라 침략을 방비하기 위하여 소가야가 쌓은 성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성은 고성평야의 동쪽에 위치하는 거류산(해발571m)의 정상부에서 서쪽 경사면을 성내로 하여 축조된 포곡성인데 성벽은 주로 자연암반의 절벽을 이용하고 그 사이에는 산돌로 보강한 형태다. 지형상 성내를 서쪽으로 택한 것은 동쪽과 남쪽의 바다를 경계하기 위함인 듯 하며 신라는 물론 왜구 방비에도 사용된 듯하다. 대부분 남쪽에는 입구를 두고 성내에는 우물이 있었으며 성벽은 산돌을 이용하여 협축수법을 쌓았다. 소가야의 중심지인 고성 읍성을 생각한 시기가 삼국시대까지 추정될 수 있다. 현재 600m 정도는 성벽이 양호하게 남아 있고, 나머지는 훼손되었으며, 크기는 둘레 1.4㎞, 성벽의 양호한 높이 3m,..
전북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 산55 가장 오래된 지리지인「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에 보면 대모산성(大母山城)은 '교룡산성' '금성산성' 등과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대모산성은 이미 고려 이전의 축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 권 151)」순창군조에 "대모산성 주위 2백9십보 내유소천 동하불갈 유군창(大母山城 周圍 二白九十步 內有小泉 유군창(有軍倉)"이라 하였고,「동국여지승람(東 國與地勝覽, 권 39)」순창 성곽조에도 "대모산성 재군서사리 석축주칠백십척 고이십육척 재유지천각일 유군창(大母山城 在郡西四里 石築周七百十尺 高二十六尺 內有池泉各一 有軍 倉)"이라 보인다. 이상의 자료는 각각 성의 위치와 그 규모 그리고 군량을 저장한 군창(郡倉)이 설치되어 있음을 알려주고 있..